0. 사진의 정신적 현상 재현

사진은 빛이 들어가는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다. 이는 그림의 영역에서는 불가능한 사진의 특징이지만, 대상이 물리적 상황을 벗어나 생명의 위대함, 삶의 예찬 등 정신적인 현상이 될 때는 한계가 된다. 이때 사진의 역할은 대상을 관객이 '읽을'수 있도록 지시적이거나 암시적인 역할을 수행할 뿐, 주제에 대한 주관적 표현을 할 수 없다. 이 같은 특징때문에 예술로서의 사진은 빈약한 매체로 평가되어 왔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을 표현하기에는 부적합한 매체로 낙인된 사진이 표현매체에 대한 우리의 전통적 의식을 완전히 전복시켰다. 사진은 오히려 무의식 혹은 비현실과 같은 또 다른 인간의 정신적 현상들을 재현하는 데 가장 탁월한 매체라는 것을 발견했다.

사진은 미술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재현의 영역을 정복하면서, 20세기 후반 포스트 모더니즘을 여는 결정적 배경이 되었다. 그 출발점에 듀안 마이클스가 있다.


1. 두가지 형상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크게 두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구체적인 인식대상으로 '형상'이라 하고 보이는 세계를 반영한다. 다른 하나는 반대로 안보이는 세계의 어떤 것, 즉 분명한 실체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는 비구체적인 '내재적 형상'이다.

산, 바다, 사자 등 자연적 형태는 물론 사랑, 소외, 평화 등 즉각적으로 읽혀지는 정신적 형상은 물질적이든 관념적이든 언제나 구체적인 의미를 가지는 객관적인 인식 대상들이다.

그러나 관심을 끄는 것은 이러한 형상들이 아니라 이성과 논리 밖에 존재하는 또 다른 정신적 형상 즉 내재적 형상들이다. 꿈이나 환상, 음악에서 느끼는 미묘한 인상, 작가의 직감 등은 전형적인 내재적 모습이다. 또한 일상에서 갑자기 돌출되는 느낌. 예를 들자면 오랬동안 함께했던 가족에 대한 갑작스런 혐오감, 첫사랑의 이미지, 익숙한 곳에서 느끼는 아주 낮선 이상함. 그리고 어떤 자극에 의해 불연듯 취하는 순간의 도취나 자살, 충동도 상황속에 은닉된 대표적인 내재적 모습들이다.

이러한 내재적 모습을 전통적 방식으로 단 항장의 사진에 단편적으로 드러내는 으젠느 앗제 같은 초현실주의 계열 작가들이 있으며, 또한 듀안 마이클스처럼 사진의 연속적 상황으로도 암시된다. 사진들은 상황 설정을 위해 동원된 사진적 장치로 연극 시나리오이고, 상황들이 암시하는 것은 의미의 진술이 아니라 감각적 메시지이다. 관객은 작가의 설정대로 줄거리를 따라가면서 주관적 해석을 한다. 그러나 결론은 구체적인 의미가 아니라 상황에 투영된 자신의 잠재된 욕구가 된다. 한장의 사진이 주는 느낌과 다른 것은 즉각적으로 반사되는 느낌이 아니라 연극이 끝난 후 남는 감정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여운을 '사고-감정'(pens'ee-'emotion)이라고 한다. 진정한 사진의 재현대상은 보이는 인식대상이 아니라 안 보이는 형이상학적 대상이라는 것. 여기에 듀안 마이클스 사진의 사진적 주제가 있다.


2. 메시지 전달과정

그의 작품에서 메시지 전달과정은 작가의 의도와 서술적 상황과 설정 그리고 관객의 이미지 읽기의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로 작가가 표현하려는 예술적 의도나 메시지는 일상의 은밀한 주제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객관적 의미가 아닌 자신의 내적 관찰인 주관적 경험을 통해 포착된다. 궁극적으로 사진을 경험적 전달체로 이용한다.

둘째로 위의 경험적 측면을 사진적 방식으로 드러내는 설정 단계가 있다. 사진의 전통적 한계를 극복해서 시퀸스 방식과 텍스트를 동반하는 서술방식을 사용한다. 이 상황은 물론 주관적이지만 우리 모두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교차된 경험으로, 공통된 상황으로 전이된다.

마지막은 관객의 입장에서 본 사진 읽기이다. 작가의 주관적 경험이지만 어떤한 특정 사건이나 구체적인 것을 암시하지 않는 어떤 상황이 시퀸스 방식으로 보여지는 순간, 곽객 각자가 경험한 공통된 주제로 나타난다.


3. 마이클스 사진의 특징

듀안 마이클스는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는 방법으로 연속 사진을 도입했는데, 그의 연속 사진은 물론 최초의 활용은 아니다. 이미 19세기부터 연속 사진을 도입했지만, 이런 모든 사진은 공통적으로 어떤 대상에 대한 시간의 지속성과 공간의 형태 변화를 묘사하기 위한 목적을 가졌다. 그러나 마이클스의 사진은 이들의 의도와 전혀 다른 영화적 서술 구성이다. 특별한 장면이나 역사를 재구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시퀸스 방식을 동원해 관객 스스로 서술적 구성을 만들게 하는 의도가 있다. 관객은 스스로 스퀸스의 상황을 해석하고 그 뒤에 은닉된 비논리적인 무언가를 발견한다.

마이클스의 또 다른 특징은 사진에 텍스트를 첨가하는 행위이다. 이러한 진행방식을 선호하는 이유는 한 장의 사진으로 작가의 의도를 표현하기에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원래 텍스트는 광고사진에서 사진의 모호한 의미를 축소해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쓰이기 시작했다. 그 안에 있는 내용을 설명하거나 그 이미지가 만들어진 현실을 지시한다.

그러나 마이클스의 사진에 첨가된 텍스트는 오히려 관객의 자유로운 상상을 유도하고 있다. 사진을 보고 떠올린 상황이나 느낌은 다른 사람의 경우를 보여준다. 그러나 텍스트를 읽고나면 사진의 상황이 단순히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닌 자신의 경우로 확장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방식은 작가와 관객의 교차된 경험을 유도하고 있다.


4. 정신적 배경

듀안 마이클스의 시퀸스 소재들은 신비, 기적, 동성애, 종료, 예수 등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적 대상들로, 일상을 배경으로 하지만, 비현실적이고 신비적인 초월 세계를 나타낸다. 또 다른 정신적 배경은 종교적 억압에 대한 불신과 의문이다. 강요된 일부일처제, 동성애 금지, 지나친 순결 교육 등 성적 억압에 대한 편견을 암시하는 주제를 자주 사용했다.
특별히 동성애는 듀안 마이클스의 사진에서 아주 중요한 주제들 중 하나이다. 자신이 동성연애자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종교에 의해 추방된 인간 본성에 대한 의문을 던지면서, 이성관계만 선택하고 동성애를 죄악시하는 종교적 규범과 전통적 가치관을 전복시키는 상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뉴욕의 그리스도>는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종교적 폭력과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암시하는 가장 좋은 작품으로 간주된다. 실존주의적 경향에서 각 이미지에 시대의 증인으로 출현하는 그리스도는 종교적 위선이 난무하고 동성연애자를 말살시키는 폭력시대에 결코 도래하지 않는 고도와 같은 것이라고 암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궁극적인 메시지는 동성연애자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새로운 구세주의 재림을 예견하고 있다.


5. 맺음

마이클스의 사진은 동시대 작가들과 달리 외적 대상에 대한 관찰과 기록이 아니라 일상에 은닉된 내재적 형상을 재현하는 사진적 주제를 가지고 있다. 그가 활용한 시퀸스, 이미지-텍스트, 사고-순환 등은 모든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고, 그는 의심할 바 없이 70년대 진정한 개념 미술의 선구자로 간주된다. 그의 사진들은 80년대 이후 포스트 모더니즘 계열에서 흔히 볼수있는 차갑고 무기력한 측면과는 반대로 순수하고 솔직한 감정으로 대중과의 강렬한 교감을 던지고 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앗제-브레송-로버트 프랭크-듀안 마이클스로 현대 영상사진의 흐름이 이어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물론 로버트 프랭크는 랄프 깁슨이라는 제자(?)가 있지만, 랄프 깁슨이 로버트 프랭크의 이론을 발전시킨 정도라면 듀안 마이클스는 또 다른 사진의 가능성을 보여줬죠. 또한 로버트 프랭크와 동시대의 윌리엄 클라인이 있지만, 그는 사진의 '형식적' 측면의 파격에 중심을 뒀기 때문에 이 흐름안에 집어넣지는 않았습니다.

듀안 마이클스는 여러모로 마음에 드는 작가입니다. 후지산(?!)이 등장하는 사진처럼 가끔은 위트있는 사진도 있고, 그리스도의 재림처럼 진지한 주제를 담고있기도 하고, 시퀸스나 텍스트 등의 표현방식도 마음에 들거든요.
 

0. 작가론의 대두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은 1970년대 말부터 후기 구조주의자들에게 자신들의 이론을 설명하는 중요한 모델이 되었고, 모더니즘 작품에 대한 이론적 한계를 뛰어넘는 현대 영상사진의 원형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이러한 근본 원인은 작품, 특히 이미지를 이해하는 관점이 전통적인 구조 분석 방식(작품론)에서 구조 이전의 배경을 이해하는 방식(작가론)으로 변화한것에 있다.


1. 출현과 부재의 이중성

니체는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양파껍질을 벗기는 것에 비유하며 알맹이는 출현, 진리이고 껍질은 부재, 지시를 의미한다고 했다. 작가가 양파의 알맹이에 비유되는 작품의 본질을 직접 포착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본질을 드러내기 위한 특별한 매체가 필요하다. 사진의 경우에는 출현과 부재의 이중성을 분명히 지니고 있다.

사진은 촬영 대상에 대해 인위적인 번역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작가가 특별한 변형을 하지 않는 한 사진에서 작가가 나타내려는 본질은 언제나 시각적으로 '부재'의 형태로만 존재한다. 만약 촬영의도가 대상의 복사에만 국한된다면 그때의 사진은 예술영역 밖에 있을 것이다. 이러한 예술적 영역의 사진은 사진의 INDEX성을 갖는다. 예를들어 텅 빈 고가도로를 찍은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은 단순히 고가도로의 재현이 아니라 그것이 주는 느낌을 지시하고 있을 뿐이다.
예술가의 창조물은 진리를 향해가는 양파껍질이고, 이것은 진리를 지시할 뿐이다.

이렇게 지표의 형태로 사진적 주제를 은닉하면서 영상 이미지 자체를 재현 메시지로 하는 사진을 영상사진이라고 한다. 그리고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은 현대 영상사진의 전형적인 모델이 되고 있다.


2. 사진-인덱스 론

사진-인덱스 론의 기반은 대상을 보는 관점의 변화, 즉 주체의 변화에 있다. 재현의 주체가 객관적인 '대상'중심에서 주관적인 '나'로 이동한것이다. 앞에 설명한 브레송과의 차이점은 브레송의 사진은 사회적 사건과 활동 그리고 문화적 탐방을 배경으로 평범한 일상의 잔잔한 느낌과 다소 보편적인 인상들로 구성되는 반면,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적 주제는 당시 사회적 사건들과는 전혀 무관한, 극히 주관적인 자신의 인상으로, 자신의 모든 작품에서 일관성있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또한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전통적인 형식미를 강조한 브레송과는 달리 불규칙, 절단, 동요, 흐림 등 당시 전통적인 촬영에서의 금기사항을 활용하였고, 이는 오히려 상황을 더 현실적으로 나타내며 작가의 사진적 주제를 자연스럽게 반영하고 있다.

그의 주관적 사진은 구체적인 진술이 아니라 반사되는 느낌의 재현이다. 이미지 자체의 결과가 아닌 프랭크의 직감에 관계하고 있고, 이런 관점에서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 개념의 극단적 표현으로 이해된다.


3. <미국인>과 프랭크 효과

50년대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영향아래 물질적 확장과 풍요로움이 기대되던 시대였다. 로버트 프랭크의 첫 사진집 <미국인>은 55-56년 1년 동안의 미국 여행에서 찍은 사진들로 이뤄져있으며, 그의 사진은 미국의 장밋빛 이미지를 거역하는 반-미국적인 이미지들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일종의 우상파괴를 자행하고 있다. 그러나 몇몇 지식인과 예술인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의 개인적인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했고, 대중에게는 엉뚱한 사진으로 보였다.

<뉴멕시코 US 285 국도, 1956> 사진에서 느낄수 있는 것은 어떤 인덱스화된 조짐이다. 사진은 어두운 도로위의 하얀 선이 미지의 새로운 길을 안내하듯이 사진의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사진이 보여주는 장면은 아주 단순하다. 텅 빈 도로와 멀리 보이는 지평선 그리고 희미한 자동차 뿐 전혀 구체적인 사건을 설명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는 이 사진에 대해서 이미 알고있는 적절한 단어와 그 의미를 부여하려 하지만, 50년대 사람들은 이미지의 형태를 읽는 것에만 익숙해있어 이해하기에 난처했다.

사진의 진정한 이해는 결코 의미로 설명될 수 없는, 유일하게 이미지로만 암시되는 상황적인 조짐에 있다. 그의 사진에 나타나는 장면들은 그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촬영한 것이 아니라 직감적으로 포착된 인상에 따라 유일하게 자국으로 남게 된 행위의 '잔여물'일 뿐이다. 따라서 논리적 서술구조는 전혀 없으며 부재의 '인덱스'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는 응시자의 경험에 따라 각자 달라지는 사진의 주관적 확장을 가져온다.

결국 유일하게 상황적 인상으로만 이해되는 프랭크의 사진적 주제는 의미나 논리 밖에 존재하는 일종의 신호의 순수 서정시 혹은 사진가 자신의 헛소리로 간주된다. 그 자신이 반-미학적인 직감적 사진가로 자처하며, 그가 사진을 통해 보여준 것은 극히 개인적인 반응, 단순한 인상들이었다. : '나는 사진들이 진실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들은 내가 느낀 것들이고 완전히 직감적인 것이다. 거기에는 생각한 것이 없었다.'

<미국인>을 볼때 이 책이 어떤 구성 원칙이나 의도에 의해 논리적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수있다. 거기엔 유일하게 스냅으로 포착된 이미지들의 관계만 있을 뿐이다. 다시말해 각각의 이미지들은 의미의 논리적 관계가 없다.
그가 각각의 사진들을 새롭게 창조하면서 끝없이 생산하는 것은 프랭크 효과(l'effet-Frank)이다. 그가 계속 남기는 주제 밖의 빈 주제 그리고 테마없는 작은 허무들. 부재는 우리 모두의 죽음을 암시한다. 도로, 식당, 호텔의 침실, 이발소의 의자 혹은 공원의 의자는 모두 비어있다. 출현은 곧 부재가 오는 것을 알리는 신호이며 로버트 프랭크는 직감으로 이러한 신호들을 잡아냈다. 신호들의 지시대상은 객관적이고 긍정적인 것과는 관계를 가지지 않으면서 언제나 의식 주위를 떠도는 존재의 시뮬라크르들이다.
앙리 까르티에-브레송과 결정적 순간 - I. 평범미학
앙리 까르티에-브레송과 결정적 순간 - II. 결정적 순간에 대한 오해
앙리 까르티에-브레송과 결정적 순간 - III. 찰나의 존재론적 실재


앞에서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을 이해하는 접근방식으로 평범미학이라는 개념에 대해 살펴봤고, 이제 찰나의 실질적인 지시 대상을 존재론적 관점에서 파악해보려고 한다.


4. 결정적 순간을 말하는 찰나의 존재론적 실재

들뢰즈의 생성 존재론적 관점에서 볼 때 결정적 순간의 대상은 사건-시뮬라크르이고 그 존재론적 실재는 생성 혹은 무의미이다. 서로 다른 시리즈들의 일시적인 결합, 다시말해 우리의 의식과 이성주위를 돌고있는 끝없는 무의미들의 충돌과 만남의 순간. 이때 순간은 지속되는 시간속에서 직감에 의해 포착된다. 거기서 문화적 심급의 사건이 시작되고 동시에 문화가 발생된다.

결정적 찰나-순간은 또한 보이지 않는 세계(비인식 세계)에 은닉된 잠재적 실재 즉 '카이로스'의 포착을 말한다. 로고스와 반대되는 카이로스는 고대 그리스어로 원래 생사의 중요한 신체부위나 흉갑의 틈과 같이 시간이 아닌 장소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 말은 기회라는 뜻으로 딱 알맞은 것, 적절한 때, 유리한 순간 혹은 시간상 놓쳐서는 안되는 상황적인 포획을 나타내는 결정적 순간이 되었다.

그의 사진은 특별한 의미의 질서가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일상 그 자체에 산재된 카이로스들의 출현이다. 그때의 포착-순간은 사진가가 경험하는 상황 속에서 직감으로 미끄러지는 순간임과 동시에 의미의 비밀스런 균열속에서 어떤 미묘한 감성의 느낌이나 인상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우리는 오랬동안 사진을 사건을 전달하는 기록자나 관찰자로서 인식하고, 대상중심의 사유에 익숙해져있다. 대중매체 사진에서 사건의 메시지는 조화와 질서 그리고 대상 자체가 발하는 미적조화로 수렴되었고, 세상을 관조하는 창으로서 목적론적 지향점은 관객으로의 전달에 있었다. 이런 로고스적 사진에는 카이로스의 요동은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브레송의 결정적 포착-순간 즉 찰나는 관객의 전달 이전에 이미 작동자의 심연에서 돌출한 지속된 잠재적 감성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리고 사라지는 순간을 재빨리 잡는 행위로서 결정적 순간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결국 이런 순간들은 프로이드가 말하는 충동적 무의식과 같이 어떤 '시선의 무의식'을 암시한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로고스와 코스모스의 질서가 아니라 수많은 느낌의 지속들이 교차되고 충돌하여 의미를 나타내는 카이로스 들이다. 브레송은 현실에 억압되어있는 카이로스들을 자신의 직감으로 잡아내었다.


현대 영상사진의 문을 연 신호탄으로서 그리고 과학적 사고의 대척지점에서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 거의 반사적 속도로 움직이는 자신의 직감에 의해 목격한 것은 바로 이러한 거대한 카이로스의 반란이었다.



이걸로 제가 정리한 브레송에 대한 글은 끝입니다. 마지막편은 솔직히 책의 내용은 그대로 옮기다시피 했습니다. 이렇게 어렵게 써야했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데, 제가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갔거나 잘못 이해한 부분이 있을까 싶어서 최대한 원문을 그대로 요약했습니다. 내용을 대충 이해는 하겠는데 제 글솜씨로는 소화하기가 힘들었다고 해야겠죠.

처음엔 10페이지밖에 안되는 글을 읽고 정리하고 다시 쓰는게 이렇게 힘들줄 몰랐어요. 이 책에만 6명이 더 있는데, 이걸 언제 다 읽고 정리하나 생각하니 아득해지네요. 기회가 되면 현대영상사진의 계보에서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을 잇는다는 로버트 프랭크에 대해서 올려 보겠습니다. 브레송보다 이해하기 쉽기는 하던데... 쓸수있을지 모르겠네요.
앙리 까르티에-브레송과 결정적 순간 - I. 평범미학
앙리 까르티에-브레송과 결정적 순간 - II. 결정적 순간에 대한 오해


2. 브레송이 말하는 좋은 사진

평범미학에 대해 쓴 첫 글에서 브레송의 사진촬영 방식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좋은 사진의 조건은 무엇일까?


2-1. 초현실주의가 스며든 사진

첫번째 조건은 바로 초현실주의가 스며든 사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리 계산된 사건의 조직이 아니라, 삶의 소용돌이 안에서 우연에 의하여 자신이 가는대로 내버려두는 촬영행위를 말한다. 문학의 자동기술법에 해당하는 사진 촬영방식이라고 할까. 이유없이 불쑥 솟아나는 극히 주관적인 느낌과 인상, 기억의 조각들을 경험할때, 반사적으로 카메라를 대상에 가져가는 감정. 이 감정들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무의식에 잠재된 또 다른 시선이나 욕구이다.


2-2. 결정적 포착

두번째 조건은 결정적 포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루살이처럼 사라지는 현실의 가장 강렬한 순간을 재빨리 포착해야 한다는 것으로,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순간 포착을 있게 한 정신적인 행위를 말한다. 동양에서 말하는 신체와 정신의 일체 - 신체와 정신의 총체적인 정신적 개방성을 의미한다.


2-3. 질서 정연하고 기하학적

마지막 조건은 질서 정연하고 기하학적인 것 특히 황금분할을 준수하고 규칙에 따라 조화롭게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브레송은 카메라를 잡기 전에 화실에서 그림을 배운 화가였고, 그는 카메라를 기계, 도구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하나의 표현 도구로 간주했다. 또한 은퇴한 이후 오랬동안 동반자였던 라이카 카메라를 내려놓고 데셍과 그림에 몰두했다. 그에게 있어서 사진도 그림의 완벽한 구성 특히 기하학적 요소에 의거하여 조화롭게 짜여져야 했다.


3. 결정적 순간에 대한 오해

위의 법칙들은 그의 이론서인 <순간 이미지>에서 결정적 순간 미학으로 잘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 많은 사람이 잘못 이해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초 이하로 움직이는 순간 제스처로서 결정적 순간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결정적 순간은 엄밀히 말해 시공간의 순간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지속되는 시간으로부터 돌출되는 극히 짧은 정신적 순간 즉 결정적 찰나를 말한다.

이런 오류의 원인은 미국에서 이 책을 번역할때 번역자가 제목을 <순간 이미지>에서 <결정적 순간> (The Decisive Moment)으로 바꾼것에서 비롯된다. 원래 브레송은 텍스트 제목으로 결정적 찰나(instant d'ecisif)로 쓰고, '이 세상 모든 것은 결정적 순간(moment d'ecisif)을 가진다.'라고 한 레츠 추기경의 명구를 인용하였다. 그러나 레츠 추기경이 말한 결정적 순간도 시공간적인 순간이 아니라 정신적 순간이고, 브레송도 이 글을 단순히 시간의 단절 순간이라는 의미로 인용한것은 아니었다.


3-1. 전통적인 패러다임으로서 결정적 순간(moment d'ecisif)

일반적으로 사진을 찍을 때 우리는 언제나 평범하지 않은 어떤 특별한 순간을 찍으려하고 또한 거기서 모델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포착하려 한다. 이러한 포착은 일상의 유일한 순간, 결코 재현되지 않을 시간의 단절로 이해된다. 이런 단절 효과를 오늘날 가장 전통적인, 가장 널리 알려진 사진의 패러다임으로 '결정적 순간'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베트남 전쟁중 사형수의 관자놀이에 총을 쏘는 유명한 즉결처형장면에서 우리는 그 충격적인 순간의 포착, 단절을 볼수있다. 로버트 카파의 스페인 내전 사진 중, 총을 든 남자가 쓰러지는 순간의 사진 또한 이러한 강렬한 순간의 단절을 가지고 있다.


3-2.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instant d'ecisif)

그러나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은 위와 같은 시공간의 단절 순간이 아니라, 지속되는 시간에서 순간적으로 야기되는 어떤 느낌을 포착하는 순간 즉 찰나를 말한다. 이는 단순한 동작의 움직임이 아니라 감성의 순간이고, 이때 포착되는 느낌은 주체의 심층으로부터 드러나는 생성 즉 직감이다.

브레송의 결정적 포착-찰나는 체험을 통한 자신의 직감들을 포착하기 위해 언제나 일상의 중산층을 대상으로 삼았고 의도적으로 구성상의 강렬한 인상과는 전혀 다른 갑작스런 쇼크와 황홀경에 빠진 경험들을 피했다.


3-3. 오해

일반적인 패러다임에서 결정적 순간과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찰나)이 어떻게 다른지 알아봤지만, 그럼에도 결정적 순간을 사건의 진행속에서 포착된 순간 장면이나 제스처의 움직임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많다. 브레송의 사진에서 결정적 순간은 제스처의 즉각성을 동반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오히려 지속된 시간 속에서 전혀 움직임이 없는 그리고 전혀 사건이 없는 일상에서 포착된다.

지평선만 보이는 들판에 갑자기 하늘로 우뚝 솟은 가로수와 그 사이의 좁은 시골길을 보여주는 풍경사진을 알것이다. 전혀 움직임이 없는 사진이지만 분명히 결정적 순간의 포착이다. 왜냐하면 이 이미지를 촬영하게 한 근본적인 원인은 이미 지속된 들판의 지평선과 갑자기 위로 치솟은 가로수와의 상황적 교차가 야기시키는 예견치 않은 야릇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결코 사건 아닌 사건으로서 지극히 주관적인 인상의 포착만이 있었을 뿐이다. 이러한 촬영은 특히 아마추어 사진가에게 널리 알려진 이론적 공리가 되었지만 적어도 보도사진의 절정인 당시 이러한 사진은 결코 이해될 수 없는 사진이었다.

물론 결정적 순간은 많은 경우에 시간의 지속 뿐 아니라 상황적인 연속을 암시하는 시간의 단절도 포함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생-라자르 역 뒤편 물웅덩이를 건너뛰는 사람의 사진을 들수있다. 이 사진은 결정적 순간을 상징하는 사진들중 하나임과 동시에 결정적 순간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제스처의 순간 포착으로 오해하게 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또한 이 장면은 딱 한장으로 우연히 잡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물 웅덩이를 건너뛰기 이전부터 연속 촬영된 장면들중 하나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때 결정적 순간은 단지 우연이 아닌 미리 계산되고 조준된 촬영방식인 것이다.

포도주를 끼고 골목길을 돌아나오는 아이 사진에서도 우리는 포도주를 든 아이의 표정에 나타나는 순수성과 생명을 느낄수있다. 그리고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골목길 모퉁이를 돌아서는 그 순간. 그것은 골목길과 아이의 제스처가 교차되어 만드는 우연과 만남의 순간인데, 궁극적으로 움직임의 순간이 아니라 느낌의 찰나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결정적 찰나의 존재론적 실재가 무엇인지 접근해보는 부분만 남았습니다. 이건 몇번을 읽어봐도 좀 힘들군요. 시뮬라크르니 카이로스니 어려운 철학적 용어들이 많네요.

물론 이 글은 제가 쓴 글이지만, '사진마실'에서 출판한 '철학으로 읽어보는 사진예술' 이라는 책을 읽고 정리하고 덧붙이고 쉽게 풀어서 쓴 것입니다. 이경률교수님이 쓴 원문을 읽고 싶으시다면 책을 찾아보세요. 전 사촌형이 이경률교수님께 수업을 듣고 샀다는 것만 들었지, 이게 서점에서 구할 수 있는 책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글은 브레송의 사진에 대한 미학적인 접근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미학에 익숙하지 않거나 사진을 단순한 생활의 기록으로 가볍게 생각하시는 분들은 읽기 어려울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role model인 브레송과 그의 '결정적 순간'에 대해 알고 싶다면 제가 읽은 것 같은 전문 서적에서 다루는 것보다는 쉽게 이해할수 있을것입니다.


0.

앙리 까르티에-브레송. 사진을 조금 진지하게 생각해본 사람치고 브레송에 대해서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것이다. 그의 사진을 보면서 감탄했을거고, 평생 라이카에 50mm만 썼다는 그의 신화같은 얘기를 들으며 장비에 대한 욕망을 삭이기도 했을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브레송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의 사진 몇장과 전해져오는 전설로 그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까? 그의 사진이 위대한건 '결정적 순간'(decisive moment)이라는 사진촬영 방식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정적 순간이라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시공간에서 일어나는 자신과 대상의 통합 즉 완전한 조화와 균형 속에서 실행하는 삶의 생생한 생명 포착. 이게 결정적 순간의 정의다. 도대체 이 머리아픈 말이 사진촬영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걸까?


브레송의 사진은 보도사진의 형식을 가지면서, 대상의 인식주체가 집단의 공통된 의식에서 개체의 주관적 자아로 이동하는 의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즉, 객관적 사실을 전달하는 기자의 글에 참고자료처럼 붙어 기사를 읽는 사람들에게 객관적 대상을 보여주는 사진이 아니라, 그 취재 현장속에서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작가의 시선을 주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당시 실존주의와 존재론적인 사유인 유럽의 전통적 담론에 관계하면서 현대 영상사진의 이론적 배경이 된다.

결정적 순간은 일상의 단순한 시각적 포착이 아니라 사실상 어떤 '느낌'의 포착순간을 의미한다. 이것을 두가지 접근방식으로 이해해보려고 한다.


1. 평범미학

브레송의 '평범미학'을 이해하는 것이 첫번째이다. 그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 대상을 자연스럽게 포착하는 사진을 찍었고, 이는 촬영자와 대상과의 관계에서 대상간의 통합, 그리고 시공간의 통합을 불러온다.


1-1. 대상과의 통합

그는 개인적 느낌을 배제한, 정확한 전달을 위한 보도사진과는 달리, 자신이 직접 경험한 내면적인 느낌, 즉 내재적 형상을 재현한다. 즉, 역사적 사건이 아닌 지극히 일상적인 자신의 느낌들을 전달한다.

영국 조지6세 대관식에서 관중석 밑바닥에 떨어져 자고있는 관객을 찍은 사진처럼, 외형적으로는 지리적 탐방이나 역사적 사건을 암시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현장에서 생생히 포착된 예견치 못한 상황들이 그의 주 촬영대상이다.

체험현장에서 느낄 수 있는 하찮은 느낌들. 그러나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상황적인 엉뚱함과 이상함.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여운들이 만드는 결정적 순간. 바로 이러한 우연과 만남에서 그는 삶의 진실과 생명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그가 로버트 카파, 데이비드 시모르, 조지 로저를 중심으로 사진 협동조합인 매그넘을 창설하게 한 근본적인 이유가 된다. 매그넘은 당시 잡지의 압력과 편집자들의 일방적인 힘에 맞서 사진가들의 권리를 방어했다.


1-2. 시공간의 통합

시간적인 관점에서 그의 사진은 '나 이때 있었다'라고 말하듯이 촬영자가 순간의 목격자임을 암시한다. 촬영자가 상황의 증인임을 말해, 직접 체험을 통해 누구나 경험하는 일상의 평범하고 공통된 감각을 전달한다.

대부분의 경우 제스처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그의 사진들은 감상자가 이미지의 상황 전후를 상상하게 만들고 이는 곧 사진을 보는 관찰자와 사진가가 찍은 대상과의 관계를 연속적으로 만든다. 이처럼 자연스럽고 평범한 대상이나 상황을 포착하기 위해 재빨리 찍는 사진을 그는 소베트사진이라고 언급했다. 이는 사실상 시간적인 관점에서 결정적인 순간 포착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순간포착을 가능하게 해준 것은 당시 사진기가 가진 문제, 즉 쉽게 움직일수 없다는 것을 해결해준 라이카 카메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 사용한 라이카는 고정된 50mm f3.5의 렌즈가 붙어있는, 레인지 파인더도 없고 노출계도 없는 단순한 장치였다. 그러나 긴 초점을 가진 렌즈들이 인간의 시각을 왜곡할 때, 그의 50mm 렌즈와 그가 사용한 눈높이 앵글, 평상거리는 가장 인간의 시각에 가까운 시각을 재현하였다.

이와 같은 소형 카메라의 순간 포착은 당시 사진촬영에서 혁명적인 방식이 되었고, 오늘날까지 사진 촬영의 전통적 규범으로 간주되어 왔다.



글이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 쉬어가겠습니다. 다음은 브레송이 말하는 좋은 사진의 조건과 우리가 결정적 순간에 대해 오해하게된 사진들의 해명을 준비했습니다. 3편에서 가장 머리아픈 '찰나의 존재론적 실재'에 접근하는 것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울산 방어진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바닷가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다.

[20060206] Panasonic FX9

  1. Favicon of http://miloo.egloos.com miloo 2006.02.07 15:07

    목포로 이사간다며?? 진짜야??
    언제가??

  2. Favicon of http://hagun.egloos.com hagun 2006.02.07 15:22

    26일.. 그래서 이번에 내 짐 정리했다.
    제대하면 확실히 혼자 살아야할듯...

  3. Favicon of http://miloo.egloos.com miloo 2006.02.08 09:12

    하음. 그렇구나. 빨래와 청소와 요리와 설겆이와 공과금과 기타등등의 집안일이 너에게도 찾아 오는구나. 하핫.

    그나저나. 뜬금없이 목포라니. 참 멀다.



청담동 뒷길에 위치한 white hall gallery를 들어서면서 보게 된 벽에 쓰여져 있는 작가 소개에 으젠느 앗제의 이름이 보였다. 전시회를 보러 오기 전 인터넷으로 그의 사진을 접하면서 느꼈던 알 수 없는 익숙함이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최근의 사진작가들과는 사뭇 다르게 전통적인 풍경사진과 흑백 프린트만을 고집하는 작가는 과연 어떤 풍경을 담고 있을까.......

작은 전시회장안에 예상보다 훨씬 작은 흑백 프린트가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전시회장의 첫 느낌은 흑백의 심플함과 밝은 느낌. 먼저 사진을 빙 둘러봤다. 전시회장 분위기에 어울리는 흑백 프린트지만 밝은 공간에 비해 어두운 느낌의 사진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사진적인 특징은 모니터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흑백 프린트의 아련한 계조와 거친 film grain의 느낌. 하지만 그 거친 느낌 속에서도 어두운 부분 나뭇가지의 섬세한 디테일이 살아있고 구름이나 흐르는 물의 부드러움이 살아있었다. 마치 딱딱한 필름에서 만들어진 이미지가 아닌 것 같은 원근감과 풍부함이 스며있었다.




사진들을 천천히 둘러보면서 그가 단순히 자연경관을 찍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Fifty Five Birds 같은 사진을 찍기 위해 그 순간을 예상하고 기다린 그의 안목과 Fence 같은 사진에 나타난 자신이 생각한 풍경을 위해 과감하게 노출을 조절해 다른 사물들을 지워버리는 대담함. 대담하게 지워버린 사진과는 반대로 Effel이나 pragh의 철길, 각 도시의 다리 같은 사진에서 느껴지는 섬세한 선들의 완벽한 배치. Power Plant 사진에서 느껴지는 반복되는 구조물을 통한 안정적인 구도의 느낌. 안개가 자욱하게 낀 낮이나 어두운 밤의 사진이지만 밤/낮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만드는 몰입감. 그의 사진은 단지 그 풍경이 있어서 찍는 것이 아닌, 이미 결과물이 될 사진을 예상하고, 그 같은 장소를 찾아서 사진을 찍고, 자신의 의도에 어울리는 인화물을 만들기 위해 몇 번이고 인화를 거듭한 듯한 완벽한 느낌이었다.

전시회의 제목을 portrait of nature. '자연의 초상' 이라고 제목을 붙였지만, 과연 그의 사진에 자연 그대로 나온 것이 얼마나 될까? 다수의 사진은 인간의 인위적인 창조물을 담은 사진이다. 특히 Power Plant같은 사진은 자연보다는 자연을 개척한 인간적인 면이 더 강하다. 그가 존경한 사진가라는 앗제의 사진처럼 - 전시회에는 Homage to atget라는 제목의 사진도 있었다 - 인간적인 냄새가 진하게 풍기지는 않지만, 그의 사진은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라기보다는 인간의 손길을 거쳐 변화된 자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전시회를 보고 나오면서 든 생각중 하나는 리플렛의 글은 관람객에게 오히려 혼란만 가져온다는 것이다. 평론을 한다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인 ‘깊이에의 강요’가 부담스럽다. 작가의 의도는 파악하는가는 사진을 보는 관람자의 몫이지 평론가의 몫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사진에 특별한 의미의 제목을 부여하지 않았다. 그토록 공들여 만들어낸 작품에 단지 'firenze'같이 사진을 찍은 도시 이름과 위치를 적거나 혹은 ‘Fifty Five Birds’처럼 사진의 내용을 적어놓은 것뿐이다.

단지 한명의 관람객으로써 그의 사진을 평가하자면, 화가들을 위해 아무도 없는 파리의 새벽에 사진을 찍었다는 앗제를 위로하듯 그림으로 그린 듯 한 정확한 배치의 자연과 건축물을 담아 그림보다 더 강렬한 회화적인 느낌을 표현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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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에 쓴 글인데 문득 생각이 나서...
마이클 케냐 사진전은 저 갤러리에서 주기적으로 한다는 것 같은데, 기회가 되면 가볼만하다고 생각됨.
 
물론 아니겠죠. 다들 아실거예요. 그냥 자극적인 제목을 적다보니 저렇게 적었는데, 생각은 '무조건 심도가 얕다고 좋은게 아냐'라고 하면서도 풀프레임과 크롭바디를 말하면서는 꼭 심도를 얘기하더군요. 물론 심도가 풀프레임과 크롭바디를 결정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아니겠지만, 가장 크게 느끼는 것중 하나겠지요. 실제로 수동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면서 사진가의 의도가 가장 크게 반영될 수 있는 것이 조리개 수치로 인해 변하는 심도일겁니다. 셔터속도는 심도의 변화만큼 크게 느껴지지는 않지요. 이건 조리개 우선모드를 쓰는 사람이 절대적으로 많은걸 봐도 알수 있습니다.
 

필름에서 50mm를 쓰다가 크롭된 dslr을 쓰면서 35mm쯤 사용해서 화각을 대강 맞추면 두 카메라로 찍은 사진은 뭐가 다를까요? 처음엔 화각이 다른 렌즈니 원근감의 느낌 같은게 다르지 않을까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팬포커스로 찍는다면 사진은 거의 동일합니다. 배럴 디스토션이나 색수차 같은 렌즈의 특성은 나타날지 모르지만, 화각이 변할때 가장 크게 느끼는 원근감의 차이는 전혀 없다는거죠. 즉, 풀프레임의 50mm와 크롭의 환산 50mm는 같습니다. 단, 심도는 다르겠지요. 풀프레임 바디로 찍은 사진이 같은 조리개 수치로 찍어도 심도가 얕습니다. 이건 이곳 게시판은 물론 SLRCLUB같은 인터넷에서도 한참을 토론한 내용이니까 대부분 이해하실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심도가 얕으면 뭐가 좋을까요?
물론 인물을 찍으면서 뒤를 확 날려버리고 싶을때 좋을겁니다. 이것 때문에 얕은 심도에 목숨거는 경우가 많은데 제 생각에는 스냅형 디카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사람들이 얕은 심도에 목이 말라 dslr로 넘어오면서 이런 생각이 굳어진건 아닌가 싶네요. 35mm에 익숙한 사람들이 크롭된 DSLR의 사진을 보면서 아쉬움을 느끼는 경우도 있을테구요.

 
그런데 우리는 왜 35mm 풀프레임에 목을 멜까요?
 

필름에는 여러가지 규격이 있습니다. 35mm, 110mm, 120mm, 4x5, aps사이즈도 3가지나 되고... 그런데 왜 35mm필름에 3:2 비율이 대부분의 카메라가 채택한 포맷이 되었을까요? 그건 너무 작지 않은 촬상면으로 인해 확대하기도 좋았고, 카메라의 부피도 들고다니기 적당했고, 이전부터 사용하던 영화용 필름 규격이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라이카라는 걸출한 카메라가 35mm를 사용했기 때문이죠;
큼. 어쨌든 35mm가 표준처럼 정착되었고 라이카와 니콘 F시리즈의 인기에 힘입어 보도사진의 표준으로 정착되었습니다. 필름 비율은 물론 3:2였습니다. 세로로 찍었던 PEN시리즈나 X-pan같은 다른 비율의 카메라도 있었지만 소수였지요. APS사이즈 필름은 뛰어난 기능과 작은 사이즈가 무기였지만, 확대시 화질이 떨어지는 것 등의 이유로 이미 보급된 35mm시장을 뛰어넘지는 못했지요. 중형카메라는 뛰어난 화질로 승부했지만 휴대성에서 떨어지고 여러가지 부품이 커지다보니 기능상 35mm를 따라갈수가 없었지요.
여러가지를 절충해서 가장 표준적으로 쓰기 좋다고 선택된 사이즈가 35mm에 3:2 비율인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느낌에 길들여졌지요.

 
이게 문제인겁니다! 우리는 너무 길들여졌어요. 이정도 화각을 가진 렌즈는 어느정도 심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법칙은 없단 말입니다. 50mm 렌즈는 35mm 포맷에서는 표준렌즈이지만 aps 사이즈에서는 준망원이고 중형카메라에서는 광각렌즈인데 같은 심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화각과 심도는 비례,반비례하는 관계가 아니란 말입니다.

 
심도를 제외하고, 35mm와 APS, 120mm의 차이점은 뭐가 있을까요?
가장 큰 차이점은 촬상면의 크기에 따른 화질의 차이일겁니다. APS와 120mm 필름의 절대면적당 화질은 차이가 있을까요? 똑같은 감도 100의 '코닥골드'라고 가정하면 절대면적당 화질은 같습니다. 따라서 필름 사이즈가 커질수록 화질은 당연히 좋아지겠죠. 그리고 필름은 어차피 큰 사이즈를 잘라서 판매하기 때문에 크게 만드는게 별 무리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틸트와 쉬프트가 되는 대형카메라는 4x5 사이즈가 많이 쓰이지만 필요에 따라 더 큰 사이즈의 필름을 사용하지요.

 
DSLR과 가장 큰 차이점은 뭐가 될까요?
필름은 사이즈가 커지면서 기술적으로 난이도가 증가하지 않습니다. 가격의 증가폭도 CCD나 CMOS의 대형화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입니다. 하지만 CCD나 CMOS는 대형화에 한계가 있으며 크기에 따라서 가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보급형 디카와 중형카메라용 CCD백을 보면 그 어마어마한 가격차이를 알수가 있지요. 이런 상황에서 오랜세월 카메라를 만들어온 회사들이 선택한 사이즈가 예전의 APS사이즈인 것입니다. 적당한 크기에 적당한 화질.

 
앞으로 CCD나 CMOS쪽의 기술력이 늘어나면 모든 카메라 회사가 35mm 풀프레임 촬상소자를 사용하는 카메라를 생산할까요? CCD나 CMOS나 반도체의 일종이고, 반도체는 크기를 늘리기보다는 집적도를 높이는 것이 쉽습니다. 촬상소자가 커지기보다는 집적도가 높아져 화소수를 늘릴거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Nikon D1이후로 DSLR은 이런식으로 발전했다고 볼수있습니다. 캐논의 5D가 나오면서 풀프레임 촬상소자가 초고가의 바디가 아니더라도 사용될수 있을 정도로 현실성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5D의 가격이 현실적이라는 것은 지금까지의 풀프레임 DSLR에 비교한 것입니다. 같은 수준의 APS 사이즈 촬상소자를 가진 카메라들의 두배에 가까운 가격은 여전히 큰 벽으로 남아있습니다. 아무리 CCD, CMOS의 가격이 낮아지더라도 35mm 풀프레임 촬상소자를 100만원 근처의 보급형 DSLR에 적용시킬 수 있을까요? 또, APS 사이즈는 카메라의 성능을 높이는 면에서는 더 유리하다고 할수있습니다. 더 작은 미러와 프리즘으로 작은 바디를 만들 수 있고, SLR의 구조적 문제인 미러의 왕복시간을 줄여 연사속도도 빨라지고 사진가가 찍으려고 하는 상을 더 오래 볼수 있게 해줄것입니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APS사이즈의 촬상소자는 보급형 DSLR과 D200같은 높은 성능의 중급형 바디에 사용될것이고, 35mm 풀프레임 촬상소자는 화질 위주의 플래그쉽과 5D같은 화질 위주로 만들어진 중급 바디에 사용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젠가 다가올 35mm 풀프레임 하이엔드 카메라를 위해서 렌즈를 살때마다 불안해하고 고민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크롭된 사이즈에 맞춰 만들어진 렌즈들도 자신의 시장을 가지고 꾸준히 살아남을 것이고, 렌즈 회사들은 계속해서 APS 사이즈에 맞는 새로운 렌즈를 발매할 것입니다.

단지 조금 더 얕은 심도와 익숙한 화각 때문에 훨씬 더 많은 금액을 투자해서 풀프레임을 써야한다는 것은 과거의 표준에 길들여져 많은 것을 잃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트라넷 사진동호회에서 풀프레임바디하고 크롭바디하고 하도 말들이 많아서 썼던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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