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이 반반씩이라면 나는 다시 낙하산을 뛰어내려 사진을 찍겠네
 

사진을 처음 찍기 시작했을 무렵, 강렬한 로버트 카파의 사진 몇장과 그의 생애에 대해 듣게 되었다. '멋지다-'라는 것이 첫 감상이었다. 그처럼 전쟁에 종군하지는 못해도 사람들의 인식을 바꿀수있는 그런 사진을 찍고 싶었다. 현대적 저널리즘 사진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대상에 접근하는지 알게 된 이후로 포기했지만, 여전히 포토-저널리즘은 내 사진의 큰 지침이다.

카파에 대해 알게 된 이후, 그의 종군기인 이 책을 한참 찾아 헤멨다. 이미 절판된지 오래인 책을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이렇게 돌아다니다가 운좋게 LIFE지의 <In War>사진집을 발견해 그 속의 카파 사진을 보며 그의 자취를 느낄 수 있었다. 다시 카파에 열광하게 되었을 때 이 책이 다시 출판된걸 알게 되었고, 나를 카파와 이어주는 운명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로버트 카파의 가장 유명한 두장의 사진은 스페인내전때 찍은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과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라는 라이프지의 문구로 유명한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찍은 사진이다. 두 사진 모두 적진으로 전진하는 병사를 그보다 더 앞에서 찍었다는 특징이 있고, 이는 카파가 한 '만약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것은 너무 멀리서 찍었기 때문이다.'라는 말과 잘 어울리는 것 같다. 하지만 카파가 한 말이 사진가와 대상의 물리적인 거리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2차 대전에서 보여준 그의 모습을 통해 사건의 단순한 관찰자로 존재하는 사진가가 아니라 사건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사진가로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이 책을 통해 단순히 포토 저널리즘을 대표하는 전설적인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 그 이상을 볼수있다. 지뢰를 밟고 폭사한지 50년이 넘어 영웅화된 카파의 그림자 속에서 인간적인 그의 모습을 볼수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종군기의 가치는 충분해보인다. 2차대전과 시작과 끝을 함께하는 핑키와의 연애담도 있고, 아슬아슬 스릴넘치는 그만의 모험담도 있다. 매끄러운 글의 진행과 위트있는 대사들도 재미있는 전쟁영화를 보는것 같은 즐거움을 준다.


그가 전설로 남은 것은 모든 전쟁에 참전한 종군기자로서의 명성도 있었지만, 현재 전셰계적으로 가장 유명하고 뛰어난 사진을 제공하는 <매그넘>의 설립자로 얻게된 명성도 무시할수 없을 것이다. 헝가리 태생의 적국인으로 종군하면서 콜리어스와 라이프 등을 전전하며 자신의 느낌과 체험이 아닌 '사진'만을 제공해야했고, 이 사진들은 편집자들의 손에 왜곡되어 촬영 당시의 의도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사진가들의 권리를 대변해 <매그넘>을 설립했고, 매그넘은 대상에 접근해 그들의 생활을 해석하는 카파의 휴머니즘적 방식에 의거해 포토-저널리즘을 이끌었다.

매체의 중심이 사진위주의 잡지에서 TV로 옮겨가면서 우리는 전쟁의 현장을 생중계로 볼수 있게 되었고, 매체는 더 잔인하고 충격적인 현장을 사진가들에게 요구하게 되었다. 하지만 TV를 통해 전쟁을 보고 충격적인 사진을 보면서 전쟁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다고 할수 있을까. 오히려 우리는 전쟁을 현실감이 떨어지는 다른 세상의 일로 생각하게 되었고, 전쟁을 세계에 드러내고 그것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던 포토-저널리즘은 몰락했다.


카파가 앞장섰던 포토-저널리즘은 이제 예전만큼의 위력을 갖지 못하고 다른 방법과 주제로 눈을 돌리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의 사진과 글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에 몸서리치게 된다. 그것만으로도 카파의 업적은 위대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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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phantasist.egloos.com 유로스 2006.07.05 11:45 신고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2. qny37 2007.04.02 13:36 신고

    ㅎㅎ 나 금욜날 Fresh Friday로 카파 사진전 보고왔어요~

    흠.. 단점이라면.. 사진에 너무 많은걸 담아내서 연달아봤더니 피곤하다는;;

글쓰기에 대한 개론서라고 해야할까, 막연히 끄적이기만 했던 저에게 힘을 실어주는 책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글쓰기의 힘 - 디지털 시대의 생존 전략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서문에서 모든것이 디지털화 된 21세기에 글쓰기의 중요성이 대두되는 현상에 대해 설명합니다.

'(...) 가장 큰 원인 제공자는 인터넷이다. (...) 미니홈피와 네이버의 블로그가 유행하였고, 급기야 1인 미디어의 열풍이 거세졌다. 홈피나 블로그 서비스 등을 이용해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고 자신을 드러내는 사적 글쓰기가 일상화되었다.'

꽤 공감이 가는 글이었습니다. 일단 저부터도 게시판에 글을 쓰고 사진을 올리면서 글쓰기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으니까요.

1부 '왜 글쓰기인가'에서는 글쓰기가 중요한 이유와 어떤 자세로 글을 쓸것인가를 말합니다. 글을 잘 써서 성공한 사람들을 소개하고, 자전적 글을 통한 치유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글은 어떤 형태로든 '자기를 노출시키는' 창이다.'
 
'독서를 통해 쌓여진 에너지는 글 쓰는 사람의 기초 체력을 튼튼하게 할 뿐만 아니라, 글이 막힐 때 저도 모르게 그것을 꿇어주는 통쾌한 힘으로 작용한다.(...) 이런 자유로운 독서를 하지 못할 정도로 쓰기만 한다면, 집필량을 의도적으로 줄일 필요가 있다.'

'글을 써서 성공했다는 말은 두 가지를 보장해준다. 그에게 글로 소통하고 싶을 만큼의 이야깃거리가 있다는 것이 첫째이고, 이를 소통 가능한 언어로 조직할 줄 아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 둘째이다. (...) 왜 글을 쓰는가. 발언하기 위해? 유명해지기 위해? 모두 맞는 말이다. 덧붙여 글쓰기는 자기 계발의 한 방식이다. 펜을 들었을 때 비로소 무엇을 써야 할지 보인다. (...) 글로 사고하고 글로 발언하는 방법을 깨우치게 될 때, 당신에게는 훨씬 넓은 가능성의 문이 열리게 될 것이다.'

'정신과 의사들은 환자에게 '먼저 얘기하고 나중에 생각하라'고 권한다. (...) 좋은 책을 읽고 나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말을 하는 것이 중요하듯이 글로 써내려갈 때 내가 그때까지 생각해내지 못했던 내 마음 속의 엑기스가 튀어나올 수 있다.'
 
'글쓰기의 치유적 요소는 무엇일까. 제일 표면적인 것으로는 생각을 정리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 최대한 솔직히 감정에 충실한 글쓰기를 하는 것이 그 다음 과정이다. (...) 그러나 솔직함이 빠진다면, 아무리 기술적으로 훌륭한 글을 쓴다 해도 2프로의 공허함을 메우기 어렵다. 그렇다고 120프로 솔직해져서 아 해도 될 말까지 억지로 토해내는 것은 치유의 길이 아니라 자폭의 행동이 될 수 있다.'
 
'내 글은 감정적이라기 보다 이성적인 편이고, 한쪽에 치우치기보다 양 측면에서 균형 있게 보려고 배려한다. 그리고 개인적인 감정이나 생각을 드러낼 때도 '착한 면'만 보이는 경향이 있다. (...) 그러고보면 내가 나름대로 파악하고 있는 '나'와 글쓰기를 통해서 형성된 '나'는 꽤 다른 형태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 셈이다. (...) 그러나 솔직한 글쓰기가 치유적 기능을 지녔으니, 야금야금 솔직해지다 보면 언젠가는 글을 통해 그려보곤 했던 이상적인 모습에 좀더 가까워지지 않겠는가?'


1부에 있는 세 글에서 마음에 드는 구절들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뒤의 글쓰기 요령들은 이렇게 옮겨서 적어두고 싶은만큼 와닿는 것은 없었습니다. 어떤 내용인지만 소개하자면, 2부는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주제로 글쓰는 여러가지 방법을 소개하고, 3부는 '실용적 글쓰기'로 자기소개서, 독후감, 자기 이야기, 기획서, PR문서, 논술글을 쓰는 방법에 대해 설명합니다. 4부는 '전문적 글쓰기'로 김경씨를 비롯한 여러 분야의 글쟁이들의 이야기를 모아놨습니다. 5부는 '디지털 시대의 글쓰기'인데 디시인사이드의 김유식 씨 등의 디지털 글쓰기 문화의 선구자들이 바라본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마지막으로 6부는 '거장에게 듣는 글쓰기'로 이태준, 스티븐 킹과 대담하는 형식으로 글쓰기에 대해서 알아봅니다.


제가 글이라는 걸 쓰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뭔가 많이 알고 있는건 같은데 표현을 안하니까 그 지식들을 썩여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였습니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내가 얼마나 막연하게밖에 모르고 있었는지를 느꼈지요. 그래서 책도 많이 읽고 글도 많이 쓰면서 부족한 부분을 메우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도 글쓰기가 그리 발전하는 것은 안보이더군요. 약간은 낙심하고 있을 때, 이 책을 읽었습니다. 자기 글쓰기에 자신감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에게 지치지말고 꾸준히 읽고 쓰라고 독려해주는 책입니다. 아직 글쓰기를 시작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왜 글을 써야하는지 정말 상세히 가르쳐주기도 합니다.

꼭 사서 읽어야 한다고 말할 생각은 없습니다. 한번쯤 서점에 서서 1부만 읽어보기를 권할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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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만의 신작은 기대했던 장편 소설이 아니었고, 깊이에의 강요같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단편도 아니었다. 단순히 에세이라고 하기엔 진지하게 쓰여진 것 같기도 하고... 동시에 출판된 현대적 오르페우스에 대해서 썼다는 시나리오에 대한 해설집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같다.


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을 때는
나는 그것에 대해 알고있다.
하지만 누군가로부터 그것에 대해 질문을 받고, 그것에 대해 설명하려하면
나는 더 이상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쥐스킨트가 인용하며 '사랑'의 경우에 놀랍도록 들어맞는다고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은 사실 '시간'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시간보다 사랑을 나타낼때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우리는 항상 사랑을 노래하고 사랑에 상처받지만 누구도 사랑에 대해서 명확하게 설명할수 없다. 사랑은 무엇이다. 사랑은 어떻다. 라고 하는 글을 얼마나 많이 만났고, 공감했던가. 하나의 단어에 그토록 많은 정의를 내릴수 있나. 사랑을 정의한 사람과 글의 수만큼, 사랑은 설명할 수 없다.

쥐스킨트에 따르면, 시인은 자신이 잘 알고있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모르고 있는 것에 대해서 쓴다.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붓이나 펜, 악기를 집어들도록 만든다. 그는 도저히 사랑이 무언지 알수가 없었고, 그래서 사랑에 대한 글을 썼다. 난 그 글을 읽었고, 차분히 읽는 것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어서 그의 생각을 정리하며 글을 쓰게 되었다. 그래서 이 글은, 줄거리를 줄줄 읊는 식의 초등학교 방학숙제보다도 못한 글이 될것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에는 수수께끼 같은 것이 있고 다른 모든 수수께끼보다도 청중의 관심을 끄는 주제다. 하지만 왜 숨쉬는 일이나 먹는 일, 배설같은 일에는 관심이 없을까. <향연>에 나오는 디오티마는 '에로스는 아름다움 속에서의 잉태와 분만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랑을 배설물과 확실하게 구별해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세가지 사례가 나온다.  동물적인 사랑. 완전한 착각 속에서 고갈되어가는 에로스의 세계. 사랑의 요소인 도취·성스러움·창조적 모습이 보이지만, 일방적이었고 의식적인 포기를 하는 사랑.

이 사례들에서 사랑에 빠지면 멍청해진다는 것을 알수 있다. 현실적인 장벽에 부딛혔을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녀를 사랑해요>라는 말을 얼마나 자주 듣는가. 어떻게 우리를 멍청하고 야만적으로 만드는 것이 동시에 가장 큰 행복을 줄 수 있는가.


어떻게 사랑과 죽음이 대립된 관계가 아니라 동료로서 관계를 맺는가. 사랑과 죽음의 불행한 결합은 중세의 어둡고 순결한 죽음의 무도(舞蹈)를 충만한 에로틱의 무도로 변화시켰을때 시작되었다. 이 현상은 죽음에 대한 애호로 나타났고, 문학에서는 사디즘적인 특징으로 이어진다.

클라이스트는 연인과 함께하는 자살이야말로 친밀감의 표시이자 정조의 표현이라고 믿었다. 이는 연인과의 삶이 불가능해지자 연인을 위해서 저지른 베르테르의 자살과는 다르다. 그러나 로테에게 쓴 편지와 클라이스트의 마지막 편지는 죽음을 통해 연인이 영원히 자신의 것이 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사랑의 가장 고귀한 완성을 죽음속에서 찾으려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다.

그리하여 사랑때문에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선구자 오르페우스가 등장한다. 연인을 따라 지하세계로 향하는 오르페우스의 모습은 자살기도로 해석될 수 없다. 그는 죽음에 도전하거나 극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만큼 그녀와 지상에서 머무르려고 하는 것뿐이다. 삶을 지향하는 자살인것이다. 오르페우스적인 모습을 부여받은 예수와의 비교를 통해 인류를 구하려는 사람(혹은 신)과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의 차이를 본다. 예수의 계산된 실수와 예술가의 허영심에서 비롯된 오르페우스의 실수.

쥐스킨트의 글을 내 형편없는 글솜씨로 옮긴것에 용서를 빌며, 마지막은 그의 온전한 글을 통해 끝내야겠다.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를 감동시킨다. 왜냐하면 그것은 좌절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죽음이라는, 인간 실존의 수수께끼같은 두 개의 근원적 힘을 서로 화해시키려는 노력, 두 힘 중에서 더 강한 힘을 약한 힘과 화해시키려는 시도는 결국에는 실패로 끝이 난다. 그에 비해 죽음과 관련된 예수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비참한 최후에 이르기까지 의기양양하게 승리를 구가한다.
예수가 인간적인 연약함을 보인 경우는 딱 두 번뿐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주 잠깐 자신의 의무에 대해 의심을 품었을 때와(<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주십시오.>), 그리고 비통함 속에서 전혀 예기치 못했던, 그리고 일어나리라고 예상할 수 없었던 마지막 말(<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을 하며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이다. 물론 이 마지막 절망적 외침은 단지 신약의 첫 두 복음서에서만 나타나며, 좀 더 나중에 쓰인 <루가의 복음서>와 <요한의 복음서>에는 정치적으로는 올바르지 않은 말로 간주되고 있는 것인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그 대신 자의식이 들어있는 말,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내지는 이미 앞에서도 언급된 말 <이제 다 이루었다>라는 말로 대체된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디 있는가? 우리가 지금껏 말해온 욕망과 충동에 좌우되는 에로스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런 것은 없다. 예수의 경우에는 에로스는 나타나지 않는다. 악마는 예수를 유혹하려 할 때 벌써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아리따운 아가씨나 미소년으로 이 까다로운 젊은 목수를 유혹할 수는 없다는 것, 그 사람의 관심을 끄는 유일한 것은 권력이라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악마는 자기 앞에서 무릎을 꿇고 굴복하면 이 세상 전부를 통치할 수 있는 권력을 주겠다고 예수에게 제안하는 것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는 결코 권력을 포기할 생각은 없지만, 다른 권력, 더 커다란 권능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늘 모든 것을 헤아릴 수 있고, 자신의 감정을 제어할 수 있고, 결코 에로스의 도취에도 빠지지 않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는 매우 냉정하고 근접하기 어렵고 비인간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아마도 우리는 그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사실은 그는 인간이 아니라 신이었을 것이다.
오르페우스는 그 점에서 우리와 아주 가깝다. 기뻐 어쩔줄 모르다가도 금세 변덕을 부리고, 맹목적인 용기는 없으나 어느정도 문명화되어 있고, 빈틈없고 현명하나 완전히 치밀하지는 못하다는 점에서 그는 우리와 닮았다. 또한 오르페우스는 좌절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인간이었다. 아니, 바로 그 좌절 때문에 그는 의심할 바 없이 더 완전한 인간이었다.


눈치빠른 사람이라면 그가 아우구스티누스를 인용할 때부터 사랑에 대해서 '생각'할 뿐 결론 내리지 않을 것임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는 사랑이 세속적이고 맹목적임을 이해하고 불완전하고 모순 투성이의 사랑을 인정한다.
그가 생각한 '사랑'을 허구에 그려낸 시나리오는 어떨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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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읽었어요.

쉽게쉽게 읽히더군요. 두시간만에 다 읽었던가. 요즘 속독을 자제하고 천천히 읽는 편인데, 확실히 빠르게 읽히는 책이 있고 천천히 읽히는 책이 있는것 같애요. 바로 전에 읽은 성석제 단편집이나 소피의 세계는 아무리 집중해도 이렇게 빨리 읽히지는 않았거든요.

전에 영준님 후기대로 너무 눈물을 원하는 듯한 설정이 마음에 안들었었지만, 공지영씨의 후기를 읽고보니 그것마저도 나름대로 작가의 의도라고 생각해버리게 되네요. 사형제 폐지에 대한 목소리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그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하면서 자신의 편견과 선입관으로 대상을 판단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 어찌보면 도그빌의 그레이스와 같은 오만에 대한 이야기랄까요.

이 책, 추천도 많고 비추천도 많지만, 참 재미있어요. '재미'라는 말 또 이렇게 fun과는 관련없는 감정에 써버리는데, 감동적이라고 하면 좀 느낌이 다르고... 가슴아프면서도 어떻게 진행이 될지 흥미진진하다고 할까요. 아니, 그건 또 다른데... 아무튼 읽어볼만해요. 읽기 전에는 댄 브라운 같은 통속소설이라고 생각했는데, 읽고나니 정통문학과 통속소설은 어떻게 다른가 고민할 정도로 마음에 들었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형제도.
얼마전에 뜨거운 토론이 있었으니까 제 글 때문에 다시 토론이 일어나지는 않기를 바래요. 뭐, 무거운 주장을 하려는 것도 아니니까 괜한 걱정이겠죠.
책에서 나온 글에 따르면, 사형집행을 지켜본 사람은 사형제 폐지론자가 되고 살인현장을 본 사람은 사형제 유지를 주장한다고 해요. 전 두가지 경험이 다 없어서 뭐라고 주장할 수는 없지만, 책에서 나온 모습만 보고 살인자들의 인간적으로 변한 모습으로 그들도 저렇게 선한 인간이라고하며 사형제 폐지를 말하는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들을 그렇게 인간적으로 변화시킨건 어느날 눈을 뜨고 바라본 아침 햇살이 마지막 아침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만들어준 사형제도니까요.
언젠가 누가 말했던 것 같이 먹으면 1/10 확률로 죽지 않는 사약을 만들어서 사형제를 유지하면 어떨까하는 생각도 해봤어요. 아니면 반쯤 썩은 동아줄을 사용한다던가. 물론 이건 농담.
잘 모른다는 것은 입을 다물어야 할 최소한의 조건이라는 쥐스킨트의 말대로 전 입을 다물어야 할까봐요. 너무 떠들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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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를 줄줄 늘어놓는 후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감상과 책이 나에게 미친 영향같은 책 외적인 걸 주로 후기로 쓰기는 하지만, 이런 책을 읽으면 어떻게 후기를 적어야 할지 모르겠다. 에세이니 내용을 적을 것도 없고, 사상,철학서도 아니니 이해한 내용을 내 글로 옮겨내는 것도 무의미하다. 감상만을 적으려니 너무 짧은 후기가 될 것 같아 서론이 길다.
이 책은 장영희 서강대 영문과 교수가 조선일보에 연재한 책에 대한 소개 겸 에세이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책에 대한 간략한 소개나 줄거리가 나오는 경우도 있고, 에세이만 있는 것도 있고, 책은 거의 제목만 나오고 책과 연상된 장영희 교수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많다.

연재를 시작할 때 소개된 책을 사러 달려가도록 만드는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는데, 이 책을 읽은 후에 읽은 후에 '읽어볼 책 목록'에 추가한게 몇 권 없는걸로 봐서는, 장영희 교수 말대로 신문사의 의도와는 조금 달라지지 않았나 싶다. 그래도 누구나 이 책에서 마음에 드는 책 몇권은 만날수 있을거란 생각이 든다.
 
책에 대한 에세이 모음집이지만, 이 책의 주제는 사랑이라고 할수있다. 책에 대한 사랑, 사람에 대한 사랑, 삶에 대한 사랑, 자신에 대한 사랑.
디킨슨, 예이츠, 릴케,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의 사랑의 시와 그에 대한 에세이가 가장 마음에 닿았다. 책을 읽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게 된건지, 사랑하고 싶어서 책의 이 부분이 눈에 들어온건지 알수없지만, 이책 분명히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책이다. 근처에 사랑할 사람이 없다고 반문하지 말고, 그럴 경우 나처럼 자신과 사랑에 빠져도 좋을 것 같다. 거창하게 말하면 '삶을 사랑하라!'

 
TV에서 자신의 신체적 결함만을 보고 책을 평가하는 것을 보고 실망했다는 장영희 교수에겐 미안하지만, 그녀의 '결함'에 대해 이야기 해야겠다.
일단 난 인간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을 절대적으로 신뢰한다. 학습에 의해서, 주변 환경에 의해서 그 사람의 모습이 결정된다는 것인데, 물론 절대적으로 '어렸을 때 가난했으면 도벽이 있다'거나 '다리를 못쓰는 사람은 사랑에 목메게 된다' 이런 말이 아니다. 성격을 구성하는 절대적 요소는 못되어도 그 사람의 환경은 사상,성격적 배경이 된다는 것이다. 완전히 같은 조건에서 자라난 두 사람을 생각해보자. 물론 있을수 없겠지만, 존재한다면 비슷한 성격을 갖게 된 거라 생각한다. (같은 부모 아래서 자라난 쌍둥이? 설마 둘이 '완전히' 같은 환경에 처한다고 생각하나? 일단 둘은 부모에게서 받는 기대역할이 다를것이다.)
물론, 뭐... 유전자 같은 것도 한몫할 것이다. 예를 들면... 혈액형 같은 것? (신뢰도가 팍팍 깍여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 싶다.)


다리를 못쓰는 것이 어째서 장교수가 보여주는 삶에 대한 애정을 설명할 수 있냐고 할수도 있겠지만, 잃어버린 후에야 소중함을 느끼는 것 처럼 그녀의 '결함'이, '부족함'이 오히려 사람과 삶에 대한 애착을 일깨워주지 않았을까.
 
진중문고로 나왔길래 얼른 빌려서 다 읽었음에도, 선물용으로 이 책을 3권 샀다. 힘든 사랑을 하고있는, 책을 안읽는 친구에게 한권 보내려고 한다. 친구가 이 책에서 사랑을 읽건, 마음에 드는 책을 한권이라도 찾아내건, 화이트데이의 사탕바구니보다 값진 선물이 될거라 생각한다. ... 물론 먹지도 못하는 책을 보냈냐고 투정은 하겠지만.
 
 

 

문학의 숲을 거닐다

장영희 저 | 샘터 | 2005년 03월

ISBN : 8946415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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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miloo.egloos.com miloo 2006.03.17 20:52 신고

    Thanx. That's great timing =)

  2. Favicon of http://redhood.isloco.com miloo 2006.03.31 21:45 신고

    여기 먼저 볼랑가~ 4월 2일 일요일 저녁 6시 40분 서울극장이야. 5시쯤 만나서 같이 밥먹자 =)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트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어렸을 때 부터 교회에 다녔다. 그러나 단 한번도 종교에 완벽하게 나 자신을 맡길 수 없었다. 항상 의심이 생겼고, 모순이 눈에 들어왔다. 지식에 목말라 기독교 뿐 아니라 다양한 종교에 대해 공부했고, 믿음이 아니라 지식으로 종교를 해석하려 했다. 당연히 나에겐 믿음이 없었다. 나 자신을 알 수 업섰다. 습관처럼 교회에 가고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하면서 나에게 믿음을 달라고 외치는 중에도 난 신을 의심했고 그에게서 돌아섰다.

그 무렵 나에게 두가지 세상이 생겼다. 착하고 말 잘듣고 교회에 다니는 모범생과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을 혼자 간직한 채 세상 전부를 우습게 보던 내가 존재했다. 항상 웃으며 말을 건네면서도 속으로는 그 사람을 귀찮아하고 가볍게 생각했다. 데미안을 처음 만난것이 바로 이 때쯤인것같다. 도대체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충 읽고 던져버렸고, 다시 읽고 던졌고, 또 읽고, 읽었다. 어느새 마음에 동요가 있을 때마다 찾는 글이 되었지만 왜 데미안을 좋아하는지 알수 없었고,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냥 활자의 묶음이 머리속에 들어와 휘젖고 나가는 기분이었다. 읽고나면 차분해지는 느낌이 좋아서 가끔 한번씩 읽었다.

몇년이 흐르고 그 사이에 내 두 세상은 서로 타협하고 한 세상을 나눠가지고 있었다. 여자친구가 생겼고, 누구에게도 이야기 안했던 내 세계를 조금씩 열어보였다. 확실히 달라진 내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데미안이 내게 일으킨 변화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수많은 환경이 나를 변화시켰을거라 생각했다. 이 당시에는 데미안을 거의 이해도 못했으니까. 세상이 변한뒤로는 데미안이 내게서 점점 멀어져 어느샌가 잊혀져 버렸다.

몇년이 지나 인터넷 서점의 할인과 이벤트에 혹해서 데미안을 샀다. 상당히 많은 책을 한꺼번에 샀기 때문에 셀수 없을 정도로 읽었다고 생각했던 데미안은 다른 흥미로운 책들에 밀렸고, 이제야 다시 읽게 되었다. 이번엔 의도적으로 천천히 시간을 들여 곱씹으면서 책장을 넘겼다. 잠시 딴 생각을 해서 흐름을 놓치면 앞으로 돌아가서 다시 읽어내렸다.

놀라웠다. 내 청소년기와 대학생활의 방황이 전부 들어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많이 읽으면서도 전혀 느끼지 못했던 내 모습이었다. 물론 데미안이나 싱클레어의 모습이 완벽히 나와 같다고 할 순 없다. 난 결코 데미안같은 표식을 지니고 있는것 같지도 않고, 싱클레어처럼 스승을 만나고 자신속의 길을 발견하지도 못했다. 다만 싱클레어의 방황의 모습과 길을 찾아가려는 모습에서 나를 보았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싱클레어에게 스승이 데미안이듯이 내 스승은 이 책 '데미안'이었다. 나는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데미안의 영향을 받았고 나 자신의 길을 찾아 모험을 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 싱클레어처럼 자신의 길을 찾지 못했고, 그래서인지 여전히 교회에 가면서 고민하고는 한다. 그래도 나 자신의 탐구와 고뇌, 내가 느낄 수 있는 스승들과 느끼지 못하는 스승들의 도움으로 언젠가는 내 길을 찾을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내 투쟁이 끝나는 순간, 내 이마에도 데미안과 싱클레어와 같은 표적이 존재할거라고 믿는다.


 



헤르만 헤세 저 | 민음사 | 2000년 12월
 
ISBN : 893746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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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miloo.egloos.com miloo 2006.02.03 19:04 신고

    오. 간만에 들어보는군. 헤르만헤세의 서문. 잊을수가 없어 역시나.

  2. qny37 2007.04.02 13:39 신고

    난 중학교때 던진 이 후로 다신 거들떠도 안보게 되었는데.. ㅎㅎ;;

    새삼.. 땡기네요,, 하지만.. 이제 책이 없다는거~ ㅋㅋ


0. 세계 3대 판타지를 만나다.
 
 
어렸을때 아버지가 해외 출장을 가셔서 어머니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았고, 자연스레 어머니를 따라 책을 읽기 시작했다. 같은 책을 읽고 서로 감상을 말하면서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바람직한 방향으로 독서를 시작했던것 같다. 이때쯤 집에 ACE88이라는 전집이 있었다. 유명한 책들이 꽤 있었던걸로 기억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던 미하엘 엔데의 모모, 끝없는 이야기 같은 것도 있었고, 폭력적인 신부님과 돈 어쩌고 하는 이름의 깡패가 끊임없이 싸우면서 웃음을 유발하는 '신부님 신부님 우리 신부님'이라는 책도 있었다. 그리고 톨킨의 호빗과 반지의 제왕, 어슐라 르 귄의 어스시의 마법사가 있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소파에 누워 커다란 바게뜨를 뜯어 먹으면서 반지의 제왕에 빠져들었고, 게드와 함께 어스시를 도망다녔다. 어스시의 마법사 마지막에 게드가 그림자의 이름을 부르는 장면은 어렸을 때 읽었던 그 어떤 책보다도 엄청난 쾌감을 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10년 가량 지나서 어릴때 읽었던 반지의 제왕과 어스시의 마법사가 세계 3대 판타지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나머지 하나는 그 당시엔 생소한 이름의 '나니아 연대기'였다. 그때는 TRPG를 하면서 D&D 세계관에 익숙해지고 나름대로 많은 판타지를 읽었고, 이영도씨의 책에 빠져들었던 시기라 동화같은 느낌의 나니아 연대기에는 크게 관심이 가지 않았다. 또한 제대로 번역된 책이 없다는 말을 들으니 어렵게 구해서 읽을 생각도 없었다. 당시엔 반지의 제왕도 제대로 된 책이 없어서 아쉬운 때였다. 그렇게 또 몇년이 흘러 놀랍게도 반지의 제왕이 영화화되면서 책이 새로 번역되어 나왔고 어릴때 읽었던 전집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아쉬워하던 참에 영화를 등에 업고 나온 책을 사버렸다. 판타지에 대한 지식이 부쩍 늘어 아쉬운 점이 많은 번역이었지만 오랬만에 읽는 반지의 제왕은 어릴때 읽었던 것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내 이해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이전에 읽었던 책이 전과는 다르게 읽혀졌다. 어렸을때 머리속으로 상상했던 많은 것들이 실제로 눈앞에 나타난 영화는 더욱 놀라웠고, 매년 겨울 영화를 기다리면서 3년이 흘렀다.
 
반지의 제왕에 열광했던 3년도 금방 지나가고 갑자기 나니아 연대기 영화화 소식이 들려왔다. 사람들이 갑자기 반지의 제왕에 열광했던 것처럼 나니아 연대기도 주목받기 시작했다. 7권의 책이 한권으로 묶여서 출판됐고, yes24에서는 네티즌이 뽑은 올해의 책에 선정되기도 했다. 책 수집욕에 불타오르던 나도 왠만한 사전보다 더 두꺼운 그 책을 사게되었다. 이로써 세계 3대 판타지를 모두 읽어볼수 있다는 흡족감에 글 자체에 재미를 느끼기보다도 의무감에 나니아 연대기를 읽게 되었다.


1. 기독교적 판타지 동화?
 
나니아 연대기에 대한 평가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이 너무 기독교적 냄새가 강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나니아 연대기 안에서 아슬란은 노래로 나니아를 창조하고 자신을 희생해 생명을 구하고 다시 살아난다. 모든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는 자의 눈에 나타나고, 나니아의 마지막 날에는 믿음에 따라 아슬란을 따르는 자들만 더 높은 세계로 가게된다. 플라톤의 이데아를 들먹이며 우리 세계의 본질적 세계가 존재함을 말하지만 이미 기독교적 세계관에 익숙해져서 그냥 천국이구나, 하는 생각만 든다.
 
사랑하는 루시,
이 이야기는 너를 위해 쓴 거다. 내가 이 이야기를 시작할 무렵에는 여자 아이들이 책보다 더 빨리 자랄줄은 미처 몰랐구나. 너는 이제 요정 이야기를 읽기에는 너무 나이를 먹어 버렸고 이 글이 인쇄되어 책으로 나올 즈음에는 훨씬 더 나이가 들어 있겠지. 하지만 언젠가는 요정 이야기를 다시 읽을 나이가 될 게다. 그때는 어느 높은 선반에서 이 책을 꺼내, 먼지를 털어내고 이 책에 대한 네 생각을 나에게 말해줄 수 있겠지. 어쩌면 나는 너무 귀가 먹어서 네 말을 듣지 못하거나 너무 늙어서 네 말을 이해할수 없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래도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하는 대부로 남아있을거다.
C. S. 루이스
 
 
또 많이 나오는 말은 애들 동화같애서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위의 글은 처음 쓰여진 에피소드이자 연대적으로는 두번째 에피소드인 '사자와 마녀와 옷장'의 서문이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자상한 루이스의 모습을 볼수 있으며, 루이스는 자신의 조카에게 들려주기 위해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밝히고 있다. 자신의 조카들에 대한 애정이 이 판타지 동화를 쓰게 했지만, 기독교적 관점을 잔뜩 집어넣은걸 보면 어려서부터 이 동화를 읽은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이해하도록 만든 것 같다.
 
우리가 동화같다고 생각하는 조건은 뭐가 있을까? 단순히 문체가 동화적이라면 '~ 했어요~'라고 번역해놓으면 어떤 책이든지 동화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나니아 연대기는 번역 자체도 동화적인 느낌이 나지만, 등장인물들의 나이가 어리고 갈등구조가 단순하다는 것, 전능한 선한 인물(?)이 내용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모든 것을 해피엔딩으로 만드는 것, 무엇보다도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내려다보는 서술방식이 정말 '동화적'이다.
 
그러나 동화적이라는 것이 작품의 재미를 떨어트린다고 하기는 어렵다. 어른이 읽는 동화는 어릴적의 감성을 자극하고 자신이 잃어버린 세계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읽는 사람은 이미 동화속의 세상에서 떨어져 나왔지만 자신이 속해있었던 아름다운 기억을 추억하며 책을 읽는 동안 어머니의 품속같은 따듯함을 느낄수 있다. 그리고 나니아 연대기는 동화적 판타지지 동화는 아니다. 수많은 기독교적 암시와 상징들이 있고 이런 것들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기독교를 전혀 모른다고 해도 작가의 상상력으로 태어난 말하는 동물들과 신화적 반인반수들이 매권마다 등장해 모험을 흥미롭게 이끌어가고 있기 때문에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2. 반지의 제왕과의 비교
 
루이스와 톨킨이라는 절친한 두 친구가 쓴 나니아 연대기와 반지의 제왕은 여러가지 면에서 비교를 하게된다. 비교를 당하고 경쟁하기 위해서 쓴 글들은 아니겠지만 쓰여진 시기가 비슷하고 두 친구가 썼고 3대 판타지에 이름을 올리고 있으니 비교를 안할수가 없다.
 
두 소설은 공통적으로 '선의 승리'를 보여주고 있다. 착한자들은 행복하고 나쁜자들은 계략이 실패하고 죽거나 쫒겨난다. 그런데 공통적으로 보이는 한계가 있다. 나니아 연대기의 주인공들, 즉 선한 자들은 백인이고 무장한 모습은 십자군을 연상시킨다. 나니아를 멸망시키는 칼로르멘인들은 완벽한 이슬람의 모습이다. 반지의 제왕도 마찬가지로 백인과 백인보다 더 하얀 엘프가 검은 피부의 인간과 오크를 물리치고 평화를 되찾는다. 오래전에 쓰여진 소설이니 그 당시 시대상을 생각해보면 이해는 되지만 흰색 피부를 갖지못한 어린이들이 이 글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게될까?
 
나니아 연대기와 반지의 제왕은 판타지의 시초이고 3대 판타지로 불리면서도 지금의 판타지에서 흔히 볼수있는 마법의 체계가 없다. 3대 판타지의 다른 하나인 어스시의 마법사까지도 마법에 대한 설정이 특별히 없다는 것은 꽤 놀라웠다. D&D나 일본의 드래곤 퀘스트 류의 마법체계가 판타지를 게임화 시키면서 나타난 것인지는 알수없지만 세계 3대 판타지에는 마법체계가 없다. 놀랍지 않은가?
 
나니아 연대기는 신화적 이야기이다. 유일신이 존재하고 주인공들과 함께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반면 반지의 제왕은 특별한 신이 존재하지 않고, 인간의 힘으로 모든 것을 제압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나니아 연대기가 아이들을 대상으로 쓰여졌다면 반지의 제왕은 성인을 위한 소설이다. 언어를 하나 만들어 냈을 정도의 방대한 설정과 다양한 시들은 분명히 아이들을 위한것은 아니다.


3. 우리의 동화?
 
나는 상당히 서구적인 것을 좋아한다. 양식을 좋아하고 포도주를 마시며 서양 철학을 읽고 기독교를 믿는다. 어느샌가 서양 것들을 내것인양 친숙하게 생각하는 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는 동양사람인데 동양적인 사상이나 생활보다 서양의 것들이 훨씬 친숙하다니. 내가 도대체 왜 이렇게 됐을까?
 
어렸을때 읽은 동화들이 무엇이 있나 생각해 보게 된다. 토끼와 거북, 콩쥐 팥쥐를 시작으로 배추도사와 무도사가 보여준 많은 우리나라 설화들이 생각난다. 그리고 우리 고유의 동화보다 많고 친숙한 서양의 동화들이 있다. 어렸을때 읽은 책들은 대부분 외국 동화나 소설이었고, 만화도 루니툰 같은 것들이었다. 콩쥐팥쥐보다 백설공주와 일곱난장이가 더 친숙하게 느껴진다는 말이다. 머리를 땋고 한복을 입은 노란 얼굴의 콩쥐보다 드레스를 입은 하얀 얼굴의 백설공주가 더 친숙해진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해야할까? 어렸을 때부터 동화에서 서양적인 가치관을 주입받고 자라난 아이들은 백인종을 우월하게 여기고 서양 동화에 나오는 동양적인 모습을 오히려 더 낮설게 받아들인다. 우리나라 여자 어린이들의 목표는 신데렐라지 심청이가 아니다. 외국의 동화에 지배당하는 우리나라 아이들은 나처럼 서양 문물을 우리 고유의 것보다 더 친숙하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우리나라에 나니아 연대기 같은 뛰어난 동화가 없다는 사실이 슬프다. 환상적인 세계로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를 마음속에 심어줄 수 있는 멋진 동화. 어른이 되어서 읽어도 전혀 유치하지 않고 자신이 떠나야했던 어린 시절을 추억하게 만드는 우리의 동화가 절실하다.
 
 
 

 

C.S. 루이스 글/폴린 베인즈 그림/햇살과나무꾼 역

시공주니어 | 원제 The Chronicles of Narnia | 2005년 11월

ISBN : 8952744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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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하는게 아니라 빠져드는 거야'

오랬만에 읽는 에쿠니 가오리의 신작이다. 나 말고도 많은 사람의 기대를 받았던건지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에 올라가 버렸다. 이 정도로 유명하다는 것을 확인하니 왠지 모를 컬트적 심정에 그녀를 멀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도쿄타워를 보고 자란 소년들의 사랑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라고 밝히고 있는데, 도쿄타워와의 연관성은 별로 없어보인다. 도쿄와 타워라는 어감에서 느껴지는 일본 수도의 거대하고 세련된 느낌이나 높이 솟은 무언가를 연상하게 되는 그런것은 없는듯 싶다. 마치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써놓고 마지막 한페이지에서 두 연인이 택시를 타고가다 교통사고로 죽는 이야기에 '택시'라는 제목을 붙여놓은듯 이질감이 느껴진다. 지금까지 그녀의 탁월한 선택 - 낙하하는 저녁, 웨하스 의자 등 - 에 비하면 초라하기까지한 작명이다.
의외인것은 지금까지 그녀의 선택관 달리 '남자아이'의 사랑이야기다. 거의 대부분 여자의 입장에서 글을 전개해나갔는데 이번엔 남자. 그것도 스무살의 소년. 어쩐지 가오리 답지 않다고 해야할까. 실제로 글에서도 그전까지의 촉촉한 느낌이 빠지고 어딘가 어색한 기분이 든다.
내용은 역시나 조금 색다른 사랑이야기. 이번에는 연상의 여자를 사랑하는 스무살 남자아이들의 이야기다. 맹목적이라고 할 정도로 어머니 뻘의 여자를 사랑하고 인생의 모든 의미를 그녀에게서 찾는 토오루와 시니컬하고 약삭빠르게 사랑하는 듯 싶지만 두 여자에게 동시에 차이고 옛 애인의 딸에게 복수를 당하는 코우지. 그러면서도 다른 여자를 넘보는 괘씸한 녀석이지만 사랑스럽다-라기보다는 여자애들이 읽으면 그렇게 느끼지 않을까 싶다.
에쿠니의 소설을 읽으면 내가 과연 사랑하는 것을 아는지 의심이 생긴다. 이토록 열정적이고 맹목적으로 보이는 사랑을 할 수 있을까. 혹은 반짝반짝 빛나는의 무츠키와 곤의.. 아, 아니! 쇼코의 사랑처럼 희한한 사랑은?

'기다리는 것은 힘들지만, 기다리지 않는 시간보다 훨씬 행복하다.'






도쿄 타워

에쿠니 가오리 저 | 소담출판사 | 원제 東京タワ- | 2005년 10월
 
ISBN : 8973818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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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 대한 찬사를 들은지 얼마나 되었을까. 아마 고등학교때 논술을 준비하면서 접했던 것 같다. 대충 요약된 내용만 흝어보고 넘어갔었는데, 오랜 시간이 흘러 드디어 이 책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 소설은 우화의 형태로 되어있다. 누군가는 단순히 우화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지만, 아무래도 구소련을 비판하는 풍자가 깊게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꼭 소련이 아니더라도 공산국가는 대부분 이런 길을 걷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독재(왕권)을 벗어나 자유가 되었다고 기뻐하지만 군사정권이 생겨나고 민중은 점점 우매해지고 말 잘듣는 일꾼이 되어서 결국은 예전만도 못한 생활을 하게 되며 권력층은 민중이 벗어나고자 했던 바로 그 예전의 독재자가 된다.
우화의 형식으로 돼지, 개, 말, 양 등이 등장하지만 그 각자가 상징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모습과 너무도 흡사하다. 글을 읽다보면 단순히 구소련에 대한 이야기 뿐 아니라 어느곳에서나 볼수있는 우리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고전 읽기의 일환으로 읽으면서, 예전 논술에서 등장하던 동물농장이 도대체 어떤 소설인지 알수있었다. 그리 긴 소설도 아니고, 소련과 레닌, 스탈린을 모르더라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접할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꼭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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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전쯤에 책을 읽고 짧막하게 적어놓았던 후기입니다.
키보드로 옮기면서 수정하고 덧붙여 보려고 했는데 내용이 좀 민감한 문제가 될것같아서 그냥 끄적였던 내용만 썼습니다.
책을 읽고 후기를 꾸준히 쓰고는 있는데 여전히 읽은 책에 비하면 막막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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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는 북클럽에 올렸던 글이고, 민감한 문제가 될것 같아서 쓰지 않았던 글의 내용은 군 내부의 문제였던것 같다. 이제 생각이 안나서 쓸말이 없네;;



동물농장

조지 오웰 저/도정일 역 | 민음사 | 2001년 02월

ISBN : 893746005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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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당연하게도, 이 책을 작가의 이름없이 찾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빈치 코드로 너무 '떠버린' 댄 브라운의 첫 작품. 과연 그는 어떻게 글쓰기를 시작했을까?

국가안보국 NSA에는 암호화된 메시지를 해독하는 암호부가 있고, 암호부에는 수잔이라는 매력적인 여자와 모든 암호를 해석할수 있는 트랜슬러라는 거대한 컴퓨터가 있다. 그런데 어느 일본인 암호학자(?)가 어떤 컴퓨터로도 해석할 수 없는 암호화 기법이라는 디지털 포트리스를 발표하고 암호부에서는 이 디지털 포트리스의 키를 수잔의 남자친구를 시켜 찾아오게한다. 그런데 어쩌고 저쩌고...

국가안보국. 암호. 키. 이런 몇 단어에서 연상가능하듯이 이 소설에는 여러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역할과 계획을 가지고 대립하는 상황이 묘하게 뒤섞여 긴장감 넘치는 상황들을 만들어내고, 거대한 컴퓨터나 해킹, 라틴어 등에 대한 '해박해보이는' 지식이 소설에 빠져들게 만들고있다.

그런데, 글을 읽으면서 아쉬운 점들이 많이 느껴졌다.

표지의 작가소개에서 말한것처럼 '국가 안보와 테러 방지가 우선인가, 개인의 사생활 보호와 권리가 우선인가'를 소재로 삼기는 했지만, 그는 저 문제에 대해서 전혀 언급이 없다. 무엇이 우선인가? 그는 단순히 저런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지만 자신의 주장은 찾아볼수 없다.

또한 처음 글을 시작한 그의 문장이 매끄럽지 못한것인지 인터넷 소설들에서나 찾아볼수 있을것 같은 사소한 실수들이 눈에 보인다. 듣지 못하는 암살자에게 '들었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물리를 공부하고 주기율표를 본적이 있으면 알수있는 중요한 단서를 등장인물들이 답을 찾아내기 몇페이지 전에 제공해서 김을 빼버렸다.

해킹과 컴퓨터에 대한 묘사는 일반적인 대중을 현혹시키기에는 충분할지 모르지만 컴퓨터와 해킹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은 공중전화 박스에서 국방부 컴퓨터를 해킹하는 영화속에나 나오는 해커가 연상되어 비웃음을 참을수가 없어진다. 이 글이 언제 쓰여진 것인지 알수없으나 컴퓨터가 이렇게 일상화되어 모두들 자신의 손발처럼 컴퓨터를 다루는 지금 이 소설의 묘사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것은 다빈치 코드의 성공에 힘입어 뒤늦게 출판된 소설로는 어쩔수 없는 것이라 생각된다. 물론 5년전에 나왔더라도 컴퓨터 전문가들에게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으리라.

무엇보다도 내가 가장 싫어하는 주인공들의 신격화가 눈에 띄게 거슬린다. 분위기나 묘사를 통해 여주인공의 매력을 독자들이 느끼도록 하지 못하고 몇번씩이나 그녀가 매력적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암호학에서는 두말할것도 없이 천재적이고. 남자주인공은 돈 못버는 교수지만 여러가지 언어에서 천재적이고 그럴듯하게 생겼으며 운동도 썩 잘해서 도망도 잘 다니고 총알도 그를 피해가는 행운까지 겸비하고 있다.

내가 찾아낸 이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먼저 읽은 내 주변의 사람들은 다들 재미있게 잘 읽었다고하며, 누군가는 다빈치 코드보다 훨씬 낫다는 말도 했다. 솔직히 나도 여러가지 헛점을 느끼면서도 썩 재미있게 끝까지 읽었다고 할수있다. 하지만 수많은 무협지들도 다 재미있고, 인터넷에 올라오는 글들도 다 재미있다. 명작의 반열에 올라 수십년간 읽히지는 못하더라도 베스트셀러라도 되려면 그런 글들과 차별화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할텐데, 난 이 책에서 그런 특별한 장점을 찾지는 못했다. 훌륭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다빈치 코드로 쌓인 그의 명성을 너무 인식해서 이렇게 악평을 쏟아놓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천재작가'라는 댄 브라운의 평가는 출세작인 다빈치 코드를 읽어보고 내려야겠다.


이 글을 쓰면서, 읽기 어렵고 미묘한 감정을 담아낸 책은 읽고나서 후기를 제대로 쓰지도 못하면서 이처럼 쉽고 확실한 재미를 주는 책은 혹평을 하는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한심한가...






디지털 포트리스

댄 브라운 저/이창식 역 | 대교베텔스만 | 원제 Digital Fortress(1998) | 2005년 06월

ISBN : 8957591230
ISBN : 895759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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