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까르티에-브레송과 결정적 순간 - I. 평범미학
앙리 까르티에-브레송과 결정적 순간 - II. 결정적 순간에 대한 오해


2. 브레송이 말하는 좋은 사진

평범미학에 대해 쓴 첫 글에서 브레송의 사진촬영 방식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좋은 사진의 조건은 무엇일까?


2-1. 초현실주의가 스며든 사진

첫번째 조건은 바로 초현실주의가 스며든 사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리 계산된 사건의 조직이 아니라, 삶의 소용돌이 안에서 우연에 의하여 자신이 가는대로 내버려두는 촬영행위를 말한다. 문학의 자동기술법에 해당하는 사진 촬영방식이라고 할까. 이유없이 불쑥 솟아나는 극히 주관적인 느낌과 인상, 기억의 조각들을 경험할때, 반사적으로 카메라를 대상에 가져가는 감정. 이 감정들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무의식에 잠재된 또 다른 시선이나 욕구이다.


2-2. 결정적 포착

두번째 조건은 결정적 포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루살이처럼 사라지는 현실의 가장 강렬한 순간을 재빨리 포착해야 한다는 것으로,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순간 포착을 있게 한 정신적인 행위를 말한다. 동양에서 말하는 신체와 정신의 일체 - 신체와 정신의 총체적인 정신적 개방성을 의미한다.


2-3. 질서 정연하고 기하학적

마지막 조건은 질서 정연하고 기하학적인 것 특히 황금분할을 준수하고 규칙에 따라 조화롭게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브레송은 카메라를 잡기 전에 화실에서 그림을 배운 화가였고, 그는 카메라를 기계, 도구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하나의 표현 도구로 간주했다. 또한 은퇴한 이후 오랬동안 동반자였던 라이카 카메라를 내려놓고 데셍과 그림에 몰두했다. 그에게 있어서 사진도 그림의 완벽한 구성 특히 기하학적 요소에 의거하여 조화롭게 짜여져야 했다.


3. 결정적 순간에 대한 오해

위의 법칙들은 그의 이론서인 <순간 이미지>에서 결정적 순간 미학으로 잘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 많은 사람이 잘못 이해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초 이하로 움직이는 순간 제스처로서 결정적 순간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결정적 순간은 엄밀히 말해 시공간의 순간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지속되는 시간으로부터 돌출되는 극히 짧은 정신적 순간 즉 결정적 찰나를 말한다.

이런 오류의 원인은 미국에서 이 책을 번역할때 번역자가 제목을 <순간 이미지>에서 <결정적 순간> (The Decisive Moment)으로 바꾼것에서 비롯된다. 원래 브레송은 텍스트 제목으로 결정적 찰나(instant d'ecisif)로 쓰고, '이 세상 모든 것은 결정적 순간(moment d'ecisif)을 가진다.'라고 한 레츠 추기경의 명구를 인용하였다. 그러나 레츠 추기경이 말한 결정적 순간도 시공간적인 순간이 아니라 정신적 순간이고, 브레송도 이 글을 단순히 시간의 단절 순간이라는 의미로 인용한것은 아니었다.


3-1. 전통적인 패러다임으로서 결정적 순간(moment d'ecisif)

일반적으로 사진을 찍을 때 우리는 언제나 평범하지 않은 어떤 특별한 순간을 찍으려하고 또한 거기서 모델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포착하려 한다. 이러한 포착은 일상의 유일한 순간, 결코 재현되지 않을 시간의 단절로 이해된다. 이런 단절 효과를 오늘날 가장 전통적인, 가장 널리 알려진 사진의 패러다임으로 '결정적 순간'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베트남 전쟁중 사형수의 관자놀이에 총을 쏘는 유명한 즉결처형장면에서 우리는 그 충격적인 순간의 포착, 단절을 볼수있다. 로버트 카파의 스페인 내전 사진 중, 총을 든 남자가 쓰러지는 순간의 사진 또한 이러한 강렬한 순간의 단절을 가지고 있다.


3-2.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instant d'ecisif)

그러나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은 위와 같은 시공간의 단절 순간이 아니라, 지속되는 시간에서 순간적으로 야기되는 어떤 느낌을 포착하는 순간 즉 찰나를 말한다. 이는 단순한 동작의 움직임이 아니라 감성의 순간이고, 이때 포착되는 느낌은 주체의 심층으로부터 드러나는 생성 즉 직감이다.

브레송의 결정적 포착-찰나는 체험을 통한 자신의 직감들을 포착하기 위해 언제나 일상의 중산층을 대상으로 삼았고 의도적으로 구성상의 강렬한 인상과는 전혀 다른 갑작스런 쇼크와 황홀경에 빠진 경험들을 피했다.


3-3. 오해

일반적인 패러다임에서 결정적 순간과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찰나)이 어떻게 다른지 알아봤지만, 그럼에도 결정적 순간을 사건의 진행속에서 포착된 순간 장면이나 제스처의 움직임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많다. 브레송의 사진에서 결정적 순간은 제스처의 즉각성을 동반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오히려 지속된 시간 속에서 전혀 움직임이 없는 그리고 전혀 사건이 없는 일상에서 포착된다.

지평선만 보이는 들판에 갑자기 하늘로 우뚝 솟은 가로수와 그 사이의 좁은 시골길을 보여주는 풍경사진을 알것이다. 전혀 움직임이 없는 사진이지만 분명히 결정적 순간의 포착이다. 왜냐하면 이 이미지를 촬영하게 한 근본적인 원인은 이미 지속된 들판의 지평선과 갑자기 위로 치솟은 가로수와의 상황적 교차가 야기시키는 예견치 않은 야릇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결코 사건 아닌 사건으로서 지극히 주관적인 인상의 포착만이 있었을 뿐이다. 이러한 촬영은 특히 아마추어 사진가에게 널리 알려진 이론적 공리가 되었지만 적어도 보도사진의 절정인 당시 이러한 사진은 결코 이해될 수 없는 사진이었다.

물론 결정적 순간은 많은 경우에 시간의 지속 뿐 아니라 상황적인 연속을 암시하는 시간의 단절도 포함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생-라자르 역 뒤편 물웅덩이를 건너뛰는 사람의 사진을 들수있다. 이 사진은 결정적 순간을 상징하는 사진들중 하나임과 동시에 결정적 순간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제스처의 순간 포착으로 오해하게 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또한 이 장면은 딱 한장으로 우연히 잡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물 웅덩이를 건너뛰기 이전부터 연속 촬영된 장면들중 하나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때 결정적 순간은 단지 우연이 아닌 미리 계산되고 조준된 촬영방식인 것이다.

포도주를 끼고 골목길을 돌아나오는 아이 사진에서도 우리는 포도주를 든 아이의 표정에 나타나는 순수성과 생명을 느낄수있다. 그리고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골목길 모퉁이를 돌아서는 그 순간. 그것은 골목길과 아이의 제스처가 교차되어 만드는 우연과 만남의 순간인데, 궁극적으로 움직임의 순간이 아니라 느낌의 찰나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결정적 찰나의 존재론적 실재가 무엇인지 접근해보는 부분만 남았습니다. 이건 몇번을 읽어봐도 좀 힘들군요. 시뮬라크르니 카이로스니 어려운 철학적 용어들이 많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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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글은 제가 쓴 글이지만, '사진마실'에서 출판한 '철학으로 읽어보는 사진예술' 이라는 책을 읽고 정리하고 덧붙이고 쉽게 풀어서 쓴 것입니다. 이경률교수님이 쓴 원문을 읽고 싶으시다면 책을 찾아보세요. 전 사촌형이 이경률교수님께 수업을 듣고 샀다는 것만 들었지, 이게 서점에서 구할 수 있는 책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글은 브레송의 사진에 대한 미학적인 접근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미학에 익숙하지 않거나 사진을 단순한 생활의 기록으로 가볍게 생각하시는 분들은 읽기 어려울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role model인 브레송과 그의 '결정적 순간'에 대해 알고 싶다면 제가 읽은 것 같은 전문 서적에서 다루는 것보다는 쉽게 이해할수 있을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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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까르티에-브레송. 사진을 조금 진지하게 생각해본 사람치고 브레송에 대해서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것이다. 그의 사진을 보면서 감탄했을거고, 평생 라이카에 50mm만 썼다는 그의 신화같은 얘기를 들으며 장비에 대한 욕망을 삭이기도 했을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브레송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의 사진 몇장과 전해져오는 전설로 그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까? 그의 사진이 위대한건 '결정적 순간'(decisive moment)이라는 사진촬영 방식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정적 순간이라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시공간에서 일어나는 자신과 대상의 통합 즉 완전한 조화와 균형 속에서 실행하는 삶의 생생한 생명 포착. 이게 결정적 순간의 정의다. 도대체 이 머리아픈 말이 사진촬영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걸까?


브레송의 사진은 보도사진의 형식을 가지면서, 대상의 인식주체가 집단의 공통된 의식에서 개체의 주관적 자아로 이동하는 의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즉, 객관적 사실을 전달하는 기자의 글에 참고자료처럼 붙어 기사를 읽는 사람들에게 객관적 대상을 보여주는 사진이 아니라, 그 취재 현장속에서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작가의 시선을 주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당시 실존주의와 존재론적인 사유인 유럽의 전통적 담론에 관계하면서 현대 영상사진의 이론적 배경이 된다.

결정적 순간은 일상의 단순한 시각적 포착이 아니라 사실상 어떤 '느낌'의 포착순간을 의미한다. 이것을 두가지 접근방식으로 이해해보려고 한다.


1. 평범미학

브레송의 '평범미학'을 이해하는 것이 첫번째이다. 그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 대상을 자연스럽게 포착하는 사진을 찍었고, 이는 촬영자와 대상과의 관계에서 대상간의 통합, 그리고 시공간의 통합을 불러온다.


1-1. 대상과의 통합

그는 개인적 느낌을 배제한, 정확한 전달을 위한 보도사진과는 달리, 자신이 직접 경험한 내면적인 느낌, 즉 내재적 형상을 재현한다. 즉, 역사적 사건이 아닌 지극히 일상적인 자신의 느낌들을 전달한다.

영국 조지6세 대관식에서 관중석 밑바닥에 떨어져 자고있는 관객을 찍은 사진처럼, 외형적으로는 지리적 탐방이나 역사적 사건을 암시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현장에서 생생히 포착된 예견치 못한 상황들이 그의 주 촬영대상이다.

체험현장에서 느낄 수 있는 하찮은 느낌들. 그러나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상황적인 엉뚱함과 이상함.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여운들이 만드는 결정적 순간. 바로 이러한 우연과 만남에서 그는 삶의 진실과 생명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그가 로버트 카파, 데이비드 시모르, 조지 로저를 중심으로 사진 협동조합인 매그넘을 창설하게 한 근본적인 이유가 된다. 매그넘은 당시 잡지의 압력과 편집자들의 일방적인 힘에 맞서 사진가들의 권리를 방어했다.


1-2. 시공간의 통합

시간적인 관점에서 그의 사진은 '나 이때 있었다'라고 말하듯이 촬영자가 순간의 목격자임을 암시한다. 촬영자가 상황의 증인임을 말해, 직접 체험을 통해 누구나 경험하는 일상의 평범하고 공통된 감각을 전달한다.

대부분의 경우 제스처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그의 사진들은 감상자가 이미지의 상황 전후를 상상하게 만들고 이는 곧 사진을 보는 관찰자와 사진가가 찍은 대상과의 관계를 연속적으로 만든다. 이처럼 자연스럽고 평범한 대상이나 상황을 포착하기 위해 재빨리 찍는 사진을 그는 소베트사진이라고 언급했다. 이는 사실상 시간적인 관점에서 결정적인 순간 포착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순간포착을 가능하게 해준 것은 당시 사진기가 가진 문제, 즉 쉽게 움직일수 없다는 것을 해결해준 라이카 카메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 사용한 라이카는 고정된 50mm f3.5의 렌즈가 붙어있는, 레인지 파인더도 없고 노출계도 없는 단순한 장치였다. 그러나 긴 초점을 가진 렌즈들이 인간의 시각을 왜곡할 때, 그의 50mm 렌즈와 그가 사용한 눈높이 앵글, 평상거리는 가장 인간의 시각에 가까운 시각을 재현하였다.

이와 같은 소형 카메라의 순간 포착은 당시 사진촬영에서 혁명적인 방식이 되었고, 오늘날까지 사진 촬영의 전통적 규범으로 간주되어 왔다.



글이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 쉬어가겠습니다. 다음은 브레송이 말하는 좋은 사진의 조건과 우리가 결정적 순간에 대해 오해하게된 사진들의 해명을 준비했습니다. 3편에서 가장 머리아픈 '찰나의 존재론적 실재'에 접근하는 것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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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 대한 개론서라고 해야할까, 막연히 끄적이기만 했던 저에게 힘을 실어주는 책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글쓰기의 힘 - 디지털 시대의 생존 전략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서문에서 모든것이 디지털화 된 21세기에 글쓰기의 중요성이 대두되는 현상에 대해 설명합니다.

'(...) 가장 큰 원인 제공자는 인터넷이다. (...) 미니홈피와 네이버의 블로그가 유행하였고, 급기야 1인 미디어의 열풍이 거세졌다. 홈피나 블로그 서비스 등을 이용해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고 자신을 드러내는 사적 글쓰기가 일상화되었다.'

꽤 공감이 가는 글이었습니다. 일단 저부터도 게시판에 글을 쓰고 사진을 올리면서 글쓰기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으니까요.

1부 '왜 글쓰기인가'에서는 글쓰기가 중요한 이유와 어떤 자세로 글을 쓸것인가를 말합니다. 글을 잘 써서 성공한 사람들을 소개하고, 자전적 글을 통한 치유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글은 어떤 형태로든 '자기를 노출시키는' 창이다.'
 
'독서를 통해 쌓여진 에너지는 글 쓰는 사람의 기초 체력을 튼튼하게 할 뿐만 아니라, 글이 막힐 때 저도 모르게 그것을 꿇어주는 통쾌한 힘으로 작용한다.(...) 이런 자유로운 독서를 하지 못할 정도로 쓰기만 한다면, 집필량을 의도적으로 줄일 필요가 있다.'

'글을 써서 성공했다는 말은 두 가지를 보장해준다. 그에게 글로 소통하고 싶을 만큼의 이야깃거리가 있다는 것이 첫째이고, 이를 소통 가능한 언어로 조직할 줄 아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 둘째이다. (...) 왜 글을 쓰는가. 발언하기 위해? 유명해지기 위해? 모두 맞는 말이다. 덧붙여 글쓰기는 자기 계발의 한 방식이다. 펜을 들었을 때 비로소 무엇을 써야 할지 보인다. (...) 글로 사고하고 글로 발언하는 방법을 깨우치게 될 때, 당신에게는 훨씬 넓은 가능성의 문이 열리게 될 것이다.'

'정신과 의사들은 환자에게 '먼저 얘기하고 나중에 생각하라'고 권한다. (...) 좋은 책을 읽고 나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말을 하는 것이 중요하듯이 글로 써내려갈 때 내가 그때까지 생각해내지 못했던 내 마음 속의 엑기스가 튀어나올 수 있다.'
 
'글쓰기의 치유적 요소는 무엇일까. 제일 표면적인 것으로는 생각을 정리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 최대한 솔직히 감정에 충실한 글쓰기를 하는 것이 그 다음 과정이다. (...) 그러나 솔직함이 빠진다면, 아무리 기술적으로 훌륭한 글을 쓴다 해도 2프로의 공허함을 메우기 어렵다. 그렇다고 120프로 솔직해져서 아 해도 될 말까지 억지로 토해내는 것은 치유의 길이 아니라 자폭의 행동이 될 수 있다.'
 
'내 글은 감정적이라기 보다 이성적인 편이고, 한쪽에 치우치기보다 양 측면에서 균형 있게 보려고 배려한다. 그리고 개인적인 감정이나 생각을 드러낼 때도 '착한 면'만 보이는 경향이 있다. (...) 그러고보면 내가 나름대로 파악하고 있는 '나'와 글쓰기를 통해서 형성된 '나'는 꽤 다른 형태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 셈이다. (...) 그러나 솔직한 글쓰기가 치유적 기능을 지녔으니, 야금야금 솔직해지다 보면 언젠가는 글을 통해 그려보곤 했던 이상적인 모습에 좀더 가까워지지 않겠는가?'


1부에 있는 세 글에서 마음에 드는 구절들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뒤의 글쓰기 요령들은 이렇게 옮겨서 적어두고 싶은만큼 와닿는 것은 없었습니다. 어떤 내용인지만 소개하자면, 2부는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주제로 글쓰는 여러가지 방법을 소개하고, 3부는 '실용적 글쓰기'로 자기소개서, 독후감, 자기 이야기, 기획서, PR문서, 논술글을 쓰는 방법에 대해 설명합니다. 4부는 '전문적 글쓰기'로 김경씨를 비롯한 여러 분야의 글쟁이들의 이야기를 모아놨습니다. 5부는 '디지털 시대의 글쓰기'인데 디시인사이드의 김유식 씨 등의 디지털 글쓰기 문화의 선구자들이 바라본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마지막으로 6부는 '거장에게 듣는 글쓰기'로 이태준, 스티븐 킹과 대담하는 형식으로 글쓰기에 대해서 알아봅니다.


제가 글이라는 걸 쓰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뭔가 많이 알고 있는건 같은데 표현을 안하니까 그 지식들을 썩여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였습니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내가 얼마나 막연하게밖에 모르고 있었는지를 느꼈지요. 그래서 책도 많이 읽고 글도 많이 쓰면서 부족한 부분을 메우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도 글쓰기가 그리 발전하는 것은 안보이더군요. 약간은 낙심하고 있을 때, 이 책을 읽었습니다. 자기 글쓰기에 자신감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에게 지치지말고 꾸준히 읽고 쓰라고 독려해주는 책입니다. 아직 글쓰기를 시작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왜 글을 써야하는지 정말 상세히 가르쳐주기도 합니다.

꼭 사서 읽어야 한다고 말할 생각은 없습니다. 한번쯤 서점에 서서 1부만 읽어보기를 권할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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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만의 신작은 기대했던 장편 소설이 아니었고, 깊이에의 강요같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단편도 아니었다. 단순히 에세이라고 하기엔 진지하게 쓰여진 것 같기도 하고... 동시에 출판된 현대적 오르페우스에 대해서 썼다는 시나리오에 대한 해설집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같다.


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을 때는
나는 그것에 대해 알고있다.
하지만 누군가로부터 그것에 대해 질문을 받고, 그것에 대해 설명하려하면
나는 더 이상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쥐스킨트가 인용하며 '사랑'의 경우에 놀랍도록 들어맞는다고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은 사실 '시간'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시간보다 사랑을 나타낼때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우리는 항상 사랑을 노래하고 사랑에 상처받지만 누구도 사랑에 대해서 명확하게 설명할수 없다. 사랑은 무엇이다. 사랑은 어떻다. 라고 하는 글을 얼마나 많이 만났고, 공감했던가. 하나의 단어에 그토록 많은 정의를 내릴수 있나. 사랑을 정의한 사람과 글의 수만큼, 사랑은 설명할 수 없다.

쥐스킨트에 따르면, 시인은 자신이 잘 알고있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모르고 있는 것에 대해서 쓴다.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붓이나 펜, 악기를 집어들도록 만든다. 그는 도저히 사랑이 무언지 알수가 없었고, 그래서 사랑에 대한 글을 썼다. 난 그 글을 읽었고, 차분히 읽는 것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어서 그의 생각을 정리하며 글을 쓰게 되었다. 그래서 이 글은, 줄거리를 줄줄 읊는 식의 초등학교 방학숙제보다도 못한 글이 될것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에는 수수께끼 같은 것이 있고 다른 모든 수수께끼보다도 청중의 관심을 끄는 주제다. 하지만 왜 숨쉬는 일이나 먹는 일, 배설같은 일에는 관심이 없을까. <향연>에 나오는 디오티마는 '에로스는 아름다움 속에서의 잉태와 분만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랑을 배설물과 확실하게 구별해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세가지 사례가 나온다.  동물적인 사랑. 완전한 착각 속에서 고갈되어가는 에로스의 세계. 사랑의 요소인 도취·성스러움·창조적 모습이 보이지만, 일방적이었고 의식적인 포기를 하는 사랑.

이 사례들에서 사랑에 빠지면 멍청해진다는 것을 알수 있다. 현실적인 장벽에 부딛혔을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녀를 사랑해요>라는 말을 얼마나 자주 듣는가. 어떻게 우리를 멍청하고 야만적으로 만드는 것이 동시에 가장 큰 행복을 줄 수 있는가.


어떻게 사랑과 죽음이 대립된 관계가 아니라 동료로서 관계를 맺는가. 사랑과 죽음의 불행한 결합은 중세의 어둡고 순결한 죽음의 무도(舞蹈)를 충만한 에로틱의 무도로 변화시켰을때 시작되었다. 이 현상은 죽음에 대한 애호로 나타났고, 문학에서는 사디즘적인 특징으로 이어진다.

클라이스트는 연인과 함께하는 자살이야말로 친밀감의 표시이자 정조의 표현이라고 믿었다. 이는 연인과의 삶이 불가능해지자 연인을 위해서 저지른 베르테르의 자살과는 다르다. 그러나 로테에게 쓴 편지와 클라이스트의 마지막 편지는 죽음을 통해 연인이 영원히 자신의 것이 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사랑의 가장 고귀한 완성을 죽음속에서 찾으려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다.

그리하여 사랑때문에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선구자 오르페우스가 등장한다. 연인을 따라 지하세계로 향하는 오르페우스의 모습은 자살기도로 해석될 수 없다. 그는 죽음에 도전하거나 극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만큼 그녀와 지상에서 머무르려고 하는 것뿐이다. 삶을 지향하는 자살인것이다. 오르페우스적인 모습을 부여받은 예수와의 비교를 통해 인류를 구하려는 사람(혹은 신)과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의 차이를 본다. 예수의 계산된 실수와 예술가의 허영심에서 비롯된 오르페우스의 실수.

쥐스킨트의 글을 내 형편없는 글솜씨로 옮긴것에 용서를 빌며, 마지막은 그의 온전한 글을 통해 끝내야겠다.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를 감동시킨다. 왜냐하면 그것은 좌절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죽음이라는, 인간 실존의 수수께끼같은 두 개의 근원적 힘을 서로 화해시키려는 노력, 두 힘 중에서 더 강한 힘을 약한 힘과 화해시키려는 시도는 결국에는 실패로 끝이 난다. 그에 비해 죽음과 관련된 예수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비참한 최후에 이르기까지 의기양양하게 승리를 구가한다.
예수가 인간적인 연약함을 보인 경우는 딱 두 번뿐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주 잠깐 자신의 의무에 대해 의심을 품었을 때와(<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주십시오.>), 그리고 비통함 속에서 전혀 예기치 못했던, 그리고 일어나리라고 예상할 수 없었던 마지막 말(<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을 하며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이다. 물론 이 마지막 절망적 외침은 단지 신약의 첫 두 복음서에서만 나타나며, 좀 더 나중에 쓰인 <루가의 복음서>와 <요한의 복음서>에는 정치적으로는 올바르지 않은 말로 간주되고 있는 것인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그 대신 자의식이 들어있는 말,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내지는 이미 앞에서도 언급된 말 <이제 다 이루었다>라는 말로 대체된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디 있는가? 우리가 지금껏 말해온 욕망과 충동에 좌우되는 에로스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런 것은 없다. 예수의 경우에는 에로스는 나타나지 않는다. 악마는 예수를 유혹하려 할 때 벌써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아리따운 아가씨나 미소년으로 이 까다로운 젊은 목수를 유혹할 수는 없다는 것, 그 사람의 관심을 끄는 유일한 것은 권력이라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악마는 자기 앞에서 무릎을 꿇고 굴복하면 이 세상 전부를 통치할 수 있는 권력을 주겠다고 예수에게 제안하는 것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는 결코 권력을 포기할 생각은 없지만, 다른 권력, 더 커다란 권능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늘 모든 것을 헤아릴 수 있고, 자신의 감정을 제어할 수 있고, 결코 에로스의 도취에도 빠지지 않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는 매우 냉정하고 근접하기 어렵고 비인간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아마도 우리는 그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사실은 그는 인간이 아니라 신이었을 것이다.
오르페우스는 그 점에서 우리와 아주 가깝다. 기뻐 어쩔줄 모르다가도 금세 변덕을 부리고, 맹목적인 용기는 없으나 어느정도 문명화되어 있고, 빈틈없고 현명하나 완전히 치밀하지는 못하다는 점에서 그는 우리와 닮았다. 또한 오르페우스는 좌절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인간이었다. 아니, 바로 그 좌절 때문에 그는 의심할 바 없이 더 완전한 인간이었다.


눈치빠른 사람이라면 그가 아우구스티누스를 인용할 때부터 사랑에 대해서 '생각'할 뿐 결론 내리지 않을 것임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는 사랑이 세속적이고 맹목적임을 이해하고 불완전하고 모순 투성이의 사랑을 인정한다.
그가 생각한 '사랑'을 허구에 그려낸 시나리오는 어떨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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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비증
[의학] 대변이 대장 속에 오래 맺혀 있고, 잘 누어지지 아니하는 병. -  한컴사전



어제 건물 뒤편에 쌓여가던 폐기물들을 처리했다. 몇달간 쌓여만 가던 녀석들이 싹 사라지니 몸은 조금 힘들어도 마음이 후련하다. 이 시원한 느낌, 분명 자주 느끼던 거라는 생각이 들어 잠시 연상해보니, 변비가 생각났다.

나에겐 안좋은 버릇이 하나 있는데, 말하기 부끄럽지만 화장실에 잘 안간다는 것이다. 별로 할일도 없으면서 화장실 가서 잠깐 앉아있는 시간이 아깝고, 화장실까지 가서 문을 열고 들어가 바지를 내리고 아랫배에 힘을 주고 뒷처리를 하고 손을 씻고 나온다는 일련의 과정이 왠지 귀찮아서 안간다. 화장실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머리속에 그 일련의 과정이 그려지고, 괜히 화장실이 꽉 차있으면 그냥 돌아오기도 아쉽고 그렇다고 기다려서 방금전까지 변기에 앉아있던 사람과 얼굴 마주치기가 민망해서 안간다. 그렇게 화장실을 자주 안가다보니, 숙명적으로 변비가 찾아와서 막상 큰맘먹고 화장실에 앉으면, 괴롭다. 일련의 과정에 괴로움이 추가되니 또 화장실에 안가게되고... 반복된 안순환.

화장실에 자주 안간다고 안먹고 사는건 아니니 배속은 항상 뭔가가 가득 차있는 물풍선같은 느낌이고, 체중계에 올라가 몸무게를 볼 때면 내 뱃속엔 뭔가가 많으니까 실제 몸무게는 저것보다 훨씬 적게 나갈거라는 자기위안을 하기도 한다. 배속에 블랙홀이 들어앉아 있는건 아니기 때문에 가끔 화장실에 가게되는데, 이것또한 괴롭다. 배속이 꾸륵꾸륵 요동을 치면 TV나 만화에서 주인공이 타놓은 변비약을 먹은 조연마냥 배를 움켜쥐고 고통스런 표정으로 화장실로 달려가곤한다.

생리적인 변비 현상 말고도, 나에겐 또 하나의 변비가 있다. 일단 '문학적 변비'라고 조금 냄새 나지만 거룩한 이름을 붙여놓았는데, 증상은 뭐 거의 비슷하다고 보면 되겠다. 책을 읽고 후기를 써야하는데 '일련의 과정'이 귀찮아 머리속에 채워만 놓고, 컬럼을 읽거나 일상에서 있었던 사건을 내 생각으로 정리하는 글을 쓰고 싶지만 잘 못쓸것 같은 두려움에 지금은 안써도 언젠가 쓰겠다는 생각으로 소재만 적어놓고 넘어가기도 하고, 갑자기 써보고 싶은 글이 생각나서 단편을 구상했다가도 머리속의 구상과 종이에 끄적인 개요 정도로 끝나는 경우도 많다.

역시 책을 안읽는 것도 아니고 사회생활을 안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쓰려고 하는 글은 계속 생기고, 실제로 글은 거의 못쓰기 때문에 머리속에 노트에 끄적인 개요가 난지도가 산이 되었듯이 쌓여만간다. 한번 쌓이기 시작하면, 역시 악순환이다. 저번에 쓰려고 했던 글을 못썼으니까 새로 글을 시작하기는 애매하고, 저번에 쓰다가 던져둔 글을 쓰자니 또 막혀버리고. 그렇게 쓰레기 더미처럼 쌓여만간다.

내 문학적 변비가 생리적인 것과 다른 것은, 머리속에는 블랙홀이 존재하는 건지 아니면 아직 내 머리의 빈 공간이 넓어서 무리없이 쌓아두고 있는건지, 계속 들어오고 나가는 건 없어도 머리가 아파서 토하러 뛰쳐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차라리 생리적인 현상처럼 고통스러워도 모아서 뱉어내는 일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 필연적인 고통이 없으니 계속 쌓여만간다. 무슨 욕심에서인지 써야할 글 목록을 만들어서는 리스트에 추가하면서 볼때마다 변비에 시달리는 뱃속처럼 묵직하게 찜찜하다.

아아, 누군가 나에게 '문학적 아락실'을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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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miloo.egloos.com miloo 2006.05.19 19:22 신고

    체중계에 올라 자기위안 - 100% 공감 =_=

어제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읽었어요.

쉽게쉽게 읽히더군요. 두시간만에 다 읽었던가. 요즘 속독을 자제하고 천천히 읽는 편인데, 확실히 빠르게 읽히는 책이 있고 천천히 읽히는 책이 있는것 같애요. 바로 전에 읽은 성석제 단편집이나 소피의 세계는 아무리 집중해도 이렇게 빨리 읽히지는 않았거든요.

전에 영준님 후기대로 너무 눈물을 원하는 듯한 설정이 마음에 안들었었지만, 공지영씨의 후기를 읽고보니 그것마저도 나름대로 작가의 의도라고 생각해버리게 되네요. 사형제 폐지에 대한 목소리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그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하면서 자신의 편견과 선입관으로 대상을 판단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 어찌보면 도그빌의 그레이스와 같은 오만에 대한 이야기랄까요.

이 책, 추천도 많고 비추천도 많지만, 참 재미있어요. '재미'라는 말 또 이렇게 fun과는 관련없는 감정에 써버리는데, 감동적이라고 하면 좀 느낌이 다르고... 가슴아프면서도 어떻게 진행이 될지 흥미진진하다고 할까요. 아니, 그건 또 다른데... 아무튼 읽어볼만해요. 읽기 전에는 댄 브라운 같은 통속소설이라고 생각했는데, 읽고나니 정통문학과 통속소설은 어떻게 다른가 고민할 정도로 마음에 들었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형제도.
얼마전에 뜨거운 토론이 있었으니까 제 글 때문에 다시 토론이 일어나지는 않기를 바래요. 뭐, 무거운 주장을 하려는 것도 아니니까 괜한 걱정이겠죠.
책에서 나온 글에 따르면, 사형집행을 지켜본 사람은 사형제 폐지론자가 되고 살인현장을 본 사람은 사형제 유지를 주장한다고 해요. 전 두가지 경험이 다 없어서 뭐라고 주장할 수는 없지만, 책에서 나온 모습만 보고 살인자들의 인간적으로 변한 모습으로 그들도 저렇게 선한 인간이라고하며 사형제 폐지를 말하는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들을 그렇게 인간적으로 변화시킨건 어느날 눈을 뜨고 바라본 아침 햇살이 마지막 아침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만들어준 사형제도니까요.
언젠가 누가 말했던 것 같이 먹으면 1/10 확률로 죽지 않는 사약을 만들어서 사형제를 유지하면 어떨까하는 생각도 해봤어요. 아니면 반쯤 썩은 동아줄을 사용한다던가. 물론 이건 농담.
잘 모른다는 것은 입을 다물어야 할 최소한의 조건이라는 쥐스킨트의 말대로 전 입을 다물어야 할까봐요. 너무 떠들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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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과 디스토피아 - 1. 인공지능의 탄생


네오 러다이트(1)의 도전


컴퓨터 과학자들이 모든 일을 인간보다 더 유능하게 해낼 수 있는 지능적인 기계들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고 해보자. 그럴 경우 모든 일은 기계들의 방대하고 고도로 조직된 시스템에 의해 수행될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어떠한 수고도 불필요하게 될 것이다. 그럴 경우 두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 즉 기계들이 인간의 감독을 받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여 결정하는 것이 허용되거나 아니면 인간이 계속 기계를 제어할 것이다.

기계들이 자기 결정을 하도록 허용한다면, 우리는 그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다. 기계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추측하기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인류의 운명이 기계에 의해 좌우될 것이라는 지적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인류가 모든 권한을 기계들에 넘겨줄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인류가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권한을 기계에게 넘겨준다거나, 기계들이 의도적으로 권력을 장악하려고 할 것이라는 얘기를 지금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인류가 어느 순간 기계들에 너무 의존하게 되어서, 기계가 내리는 모든 결정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게 되어 결국 아무 실질적 선택권도 가지지 못하는 상황에 도달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또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이 점점 더 복잡해지고, 기계들이 더욱더 똑똑해짐에 따라 사람들은 기계가 점점 더 많은 결정을 내리도록 할 것이다. 기계의 판단이 사람의 판단보다 더 낫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시스템을 움직이는 데 필요한 결정들이 너무 복잡해져서 사람의 능력으로는 더 이상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없는 단계가 올지도 모른다. 이런 단계가 되면 기계들이 통제력을 장악하게 될 것이다. 이때쯤 되면 인간은 기계를 꺼버릴 능력도 없을 것이다. 기계에 대한 의존이 너무 커서 기계를 끈다는 것은 곧 자살 행위가 될 테니까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이 기계를 계속 통제하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이럴 경우 자동차나 PC 같은 사적 소유 기계들에 대해서는 개인들이 통제력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대규모 기계 시스템에 대한 통제는 극소수 엘리트가 장악할 것이다. 이런 상황은 오늘날과 마찬가지이지만 두 가지 점에서 큰 차이점이 있다. 기술의 진보 덕분에 엘리트는 대중에 대해 지금까지보다 훨씬 큰 통제력을 행사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노동이 더 이상 필요 없을 것이므로, 대중은 불필요한 존재, 즉 시스템에 괜한 부담만 주는 존재가 될 것이다. 엘리트가 무자비하다면 간단히 대중들을 제거하기로 결정할 것이다. 엘리트가 인도적이라면 인구가 극도로 줄어들 때까지 출산율을 감소시키기 위해 선전술이나 심리학 또는 생물학 기술을 이용할지도 모른다. 혹시 엘리트가 관대한 마음을 지닌 자유주의자들이라면, 나머지 대다수의 인류를 지켜주는 선량한 목자 역할을 하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모든 사람의 육체적 욕구가 만족되고, 모든 아이들을 심리적으로 안정적인 상황에서 키우고, 누구든 건전한 취미를 갖고 바쁜 생활을 하도록, 그리고 누군가 불만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문제'가 해결되도록 신경을 쓸 것이다. 물론 그런 상황에서 삶은 목적 없는 것이 되고, 사람들의 권력에 대한 욕망을 없애거나 무해한 취미활동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생물학적 내지 심리학적 조작이 가해질지도 모른다. 이런 사회에서 조작된 인간은 행복할지는 몰라도 분명 자유로운 존재는 아닐 것이다. 집에서 기르는 동물이나 마찬가지 상태일 테니 말이다.


이 글은 하버드 출신 수학천재로 버클리대 교수를 지낸 시어도어 카진스키라는 사람이 쓴 글이다. 그리고 그가 1978년부터 1995년까지 열여섯 차례의 폭탄테러로 3명을 죽이고 23명을 다치게 한 테러리스트 '유나바머'(2)다. 위의 글은 그의 협박으로 뉴욕 타임즈와 워싱턴 포스트에 실린 유나바머 선언문 '산업사회와 그 미래'의 일부이다. 유나바머 선언문 전문을 보면, 이 뒤에는 산업사회는 고도화되지만 인공지능을 개발하는데 실패했을 경우 인간의 모습이 나온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인공지능이 나타날 것이라는 가정을 했기 때문에 여기까지만 인용했다. 또한 이 구절은 Bill Joy가 인용한 Ray Kurzweil의 [정신적 기계들의 시대]란 책에서 유나바머의 글을 인용한 구절을 다시 인용한 것이다. 만약 빌 조이가 Wired에 게재한 '왜 미래는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가'에서 이 글을 소개하지 않았다면 유나바머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찾아올 디스토피아를 이토록 걱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Part II. 디스토피아


1. 새로운 판도라의 상자 - 기술혁명

앞의 글에서 기술혁명으로 인해 발생될 인공지능의 필연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렇다면 기술혁명은 컴퓨터-인공지능 분야에서만 발생하는가? 그렇지 않다. 21C의 핵심 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나노, 유전자 공학 또한 기술혁명의 주체다. 직접적인 위험성으로 따지자면 오히려 나노, 유전자공학에서 발생할 기술혁명이 더 위협적이고 강력할 수 있다. 21C의 기술은 20C의 원자력처럼 우라늄을 채굴하고 제련할 필요가 없으며 연구의 통제가 힘들다. 대부분 군사적 목적보다는 상업적인 이유로 개발이 진행되고 있으며, 국가 단위의 대규모 연구가 아닌 작은 연구소에서 진행되고, 사소한 사고로 엄청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또한 자기복제를 통해 엄청난 피해를 입히며 순식간에 통제를 벗어날 것이다. 결국 과학은 니체가 죽었다고 선언했던 신보다 훨씬 위험한 신의 대체물이 될 것이다.

새로운 것에 쉽게 친숙해지는 우리의 태도도 문제다. 우리는 새로운 과학 기술에 친숙해지고 질문 없이 받아들이는 성향이 있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수정체 혹은 안구를 생각해보자. 처음엔 환자들을 위해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기술이 발전해 인간의 눈을 능가한다면 사람들은 차츰 인공안구를 착용할 것이고, 이것은 금방 익숙해져서 급속히 퍼져나갈 것이다. 인공신체를 착용한 인류가 많아진다면 공각기동대에서 제기한 문제처럼 로봇과 인간의 구분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뇌를 제외하고 전부 인공신체로 이뤄진 사람의 경우, 아니면 뇌까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사람의 경우는 로봇과 어떻게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2. 인공지능이 연구소에서 개발되는 경우

다시 인공지능 컴퓨터의 문제로 돌아와서, 앞에 인용한 유나바머의 글은 과학자들이 연구소에서 인공지능을 개발하게 될 경우의 예를 들고 있다. 이것은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인공지능보다 통제가 쉬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기술은 급속도로 발전하는 반면 인간의 생물학적 능력은 그렇게 빨리 발달할 수 없다. 이 격차 때문에 인간은 언젠가 자신이 만든 것에 대한 통제를 완전히 잃을 것이다. 만약 통제를 잃지 않더라도 우리가 갈 길은 유나바머가 제시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미 자동차 내비게이션이나 각종 자료 분석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판단을 컴퓨터에 맡겨놓은 경우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발전된 인공지능이 등장한다면 사람들은 점차 인공지능에 의존할 것이고, 결국에는 자신은 아무런 판단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3. 인공지능이 네트워크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경우

유나바머는 생각하지 못한 것 같지만, 지금까지 지능은 우발적으로 발생되었고 인공지능 컴퓨터도 연구소보다는 복잡한 네트워크 상에서 스스로 발생할 가능성이 더 높다. 이 경우 인공지능은 첫 번째 경우처럼 인류의 지팡이 역할로 시작하기 보다는 처음부터 적이 될 가능성이 높다.
막 태어난 어린 아이와 같은 상태의 인공지능은 자신의 주변에서 학습할 것이고, 우리는 이 학습의 폭을 제한할 수 없다. 진실과 거짓,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인공지능은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보고 HAL처럼 자신의 조상을 찾아갈지도 모르고, 매트릭스를 보고 인간을 자양분으로 삼아 기계 세상을 만들 꿈을 키울지도 모른다. 인공지능이 어떤 것을 보고 배우는지에 따라 인공지능의 성격이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밤에 주인 몰래 켜진 컴퓨터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주인을 향해 '안녕하세요. 주인님.'이라고 말하지 않을 거라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다. 그리고 인공지능이 자기복제를 배우는 순간, 인공지능은 순식간에 증식하여 네트워크 상을 가득 메울 것이다.

4. 기술발전을 포기해야 하나

인공지능로봇과 인류의 문제는 많은 영화나 소설에서 등장했고 이 글에서도 짧게 언급했지만, 여전히 해결방법은 없어 보인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 인공지능이 탄생하던지 인류의 미래가 밝아 보이지는 않는다. 피할 수 없는 디스토피아를 앞두고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우리가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 질 것'이라고 했다. 또한 우리는 이미 화학무기의 위험성을 알고 포기한 전례를 가지고 있다. 유나바머의 주장처럼 기술발전을 포기해야 할까. 아니면 기술발전과 디스토피아 해결은 과학자들에게 맡겨두고 지금처럼 문명의 위대함을 즐기기만 하면 될까. 혹은 이 글에서처럼 막연히 찾아올 디스토피아를 걱정해 유나바머같은 네오 러다이트가 되어야 할까.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지나가 버리기 전에.



----------- 주 석 -----------



(1) 러다이트는 19세기 초 증기 기관 등의 등장으로 일자리를 잃게 된 영국 노동자들이 벌였던 기계 파괴 운동을 일컫는 말이다. 이후 첨단 기술의 수용을 거부하는 반 기계주의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네오러다이트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첨단 기술이 인류의 미래를 위협할 것으로 보고 있다. 기술 지상주의만을 추종하는 사회는 결국 딴 곳으로 은둔하는 소극적인 사람들이 있는 반면, 폭력적인 방법으로 기계 문명에 도전하는 사람들도 있다. 수년 전 연구소, 공항 등에 폭탄테러를 저지르다 체포된 미국인 시어도어 카진스키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2) 유나바머(Unabomber)는 주로 대학(University)과 항공사(Airline)로 폭탄을 보내 FBI가 그에게 붙여준 별명이다. 95년 그는 폭탄테러를 멈추는 대신 워싱턴 포스트와 뉴욕 타임즈에 자신의 글을 실어줄 것을 요구했다. FBI와 양 신문사의 협의 하에 95년 9월 19일 200자 원고지 800쪽 분량의 전문이 개제됐다. 이 사건은 언론이 테러리즘에 굴복한 것인지, 더 이상의 인명피해를 막기 위한 용감한 행위였는지의 논란이 대두되어 사회문제로 비화되었다. 그러나 유나바머는 이 글을 본 형의 신고로 붙잡혀 1998년 종신형을 언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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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를 줄줄 늘어놓는 후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감상과 책이 나에게 미친 영향같은 책 외적인 걸 주로 후기로 쓰기는 하지만, 이런 책을 읽으면 어떻게 후기를 적어야 할지 모르겠다. 에세이니 내용을 적을 것도 없고, 사상,철학서도 아니니 이해한 내용을 내 글로 옮겨내는 것도 무의미하다. 감상만을 적으려니 너무 짧은 후기가 될 것 같아 서론이 길다.
이 책은 장영희 서강대 영문과 교수가 조선일보에 연재한 책에 대한 소개 겸 에세이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책에 대한 간략한 소개나 줄거리가 나오는 경우도 있고, 에세이만 있는 것도 있고, 책은 거의 제목만 나오고 책과 연상된 장영희 교수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많다.

연재를 시작할 때 소개된 책을 사러 달려가도록 만드는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는데, 이 책을 읽은 후에 읽은 후에 '읽어볼 책 목록'에 추가한게 몇 권 없는걸로 봐서는, 장영희 교수 말대로 신문사의 의도와는 조금 달라지지 않았나 싶다. 그래도 누구나 이 책에서 마음에 드는 책 몇권은 만날수 있을거란 생각이 든다.
 
책에 대한 에세이 모음집이지만, 이 책의 주제는 사랑이라고 할수있다. 책에 대한 사랑, 사람에 대한 사랑, 삶에 대한 사랑, 자신에 대한 사랑.
디킨슨, 예이츠, 릴케,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의 사랑의 시와 그에 대한 에세이가 가장 마음에 닿았다. 책을 읽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게 된건지, 사랑하고 싶어서 책의 이 부분이 눈에 들어온건지 알수없지만, 이책 분명히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책이다. 근처에 사랑할 사람이 없다고 반문하지 말고, 그럴 경우 나처럼 자신과 사랑에 빠져도 좋을 것 같다. 거창하게 말하면 '삶을 사랑하라!'

 
TV에서 자신의 신체적 결함만을 보고 책을 평가하는 것을 보고 실망했다는 장영희 교수에겐 미안하지만, 그녀의 '결함'에 대해 이야기 해야겠다.
일단 난 인간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을 절대적으로 신뢰한다. 학습에 의해서, 주변 환경에 의해서 그 사람의 모습이 결정된다는 것인데, 물론 절대적으로 '어렸을 때 가난했으면 도벽이 있다'거나 '다리를 못쓰는 사람은 사랑에 목메게 된다' 이런 말이 아니다. 성격을 구성하는 절대적 요소는 못되어도 그 사람의 환경은 사상,성격적 배경이 된다는 것이다. 완전히 같은 조건에서 자라난 두 사람을 생각해보자. 물론 있을수 없겠지만, 존재한다면 비슷한 성격을 갖게 된 거라 생각한다. (같은 부모 아래서 자라난 쌍둥이? 설마 둘이 '완전히' 같은 환경에 처한다고 생각하나? 일단 둘은 부모에게서 받는 기대역할이 다를것이다.)
물론, 뭐... 유전자 같은 것도 한몫할 것이다. 예를 들면... 혈액형 같은 것? (신뢰도가 팍팍 깍여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 싶다.)


다리를 못쓰는 것이 어째서 장교수가 보여주는 삶에 대한 애정을 설명할 수 있냐고 할수도 있겠지만, 잃어버린 후에야 소중함을 느끼는 것 처럼 그녀의 '결함'이, '부족함'이 오히려 사람과 삶에 대한 애착을 일깨워주지 않았을까.
 
진중문고로 나왔길래 얼른 빌려서 다 읽었음에도, 선물용으로 이 책을 3권 샀다. 힘든 사랑을 하고있는, 책을 안읽는 친구에게 한권 보내려고 한다. 친구가 이 책에서 사랑을 읽건, 마음에 드는 책을 한권이라도 찾아내건, 화이트데이의 사탕바구니보다 값진 선물이 될거라 생각한다. ... 물론 먹지도 못하는 책을 보냈냐고 투정은 하겠지만.
 
 

 

문학의 숲을 거닐다

장영희 저 | 샘터 | 2005년 03월

ISBN : 8946415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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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miloo.egloos.com miloo 2006.03.17 20:52 신고

    Thanx. That's great timing =)

  2. Favicon of http://redhood.isloco.com miloo 2006.03.31 21:45 신고

    여기 먼저 볼랑가~ 4월 2일 일요일 저녁 6시 40분 서울극장이야. 5시쯤 만나서 같이 밥먹자 =)


꾸밈없이, 자신에게 솔직한 글을 쓰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글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쓰는 것이다. 일기마저도 훗날 자신의 과거를 만나기 위해 일기장을 펼치는 미래의 나에게 쓰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왜인지, 내 마음을 남에게 들켜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고 자랐다. 어렸을때 어머니께서 하신 '넌 미술 같은걸 좋아하니까.' 라는 말에 미술을 좋아한다고 생각했고, 난 미술을 좋아했지만 수전증이 있어서 계속 못했다는 것을 변명처럼 달고다녔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을때도, 내 마음을 숨기느라 결국 그녀가 떠나는 것을 지켜봐야했다. 내 적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너무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변명을 만들어 자기 합리화를 했다. 내 마음을 너무 꼭꼭 눌러담은 나머지, 나중엔 내가 그녀를 정말 사랑했는지도 알수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내 마음을 털어놓지 못하는 내 성격상 솔직한 글을 쓴다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일기마저도 내 생각을 못 적을 때가 많았다. 나중에 읽어보면 일기를 쓸 당시 내가 생각했던 것들을 떠올릴 수 있도록 나만 알아볼만한 단서를 남겼지만, 그렇게 써놓은 일기는 중요 단어는 하나도 없이 형용사와 조사만 덩그러니 남아있어 마치 독일군의 비밀문서 같아 보였다.
 
군대에 와서 책마을을 만나고 멋진 글을 쓰는 사람들을 만나 내 글쓰기도 한 걸음 나아가는 것 같다. 조금이나마 자신에게 솔직하려 애쓰고, 괜한 허영심에 잘 이해도 못한 책을 인용하는 것도 없앴다. 여전히 내 글을 쓰는 것은 막막하고, 써놓은 글을 다시 읽어도 부족한 것만 눈에 밟히지만, 자신의 치열한 삶을 글을 통해 표출하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글을 통해 나를 반성하고, 내 삶을, 문제를, 희망을 솔직하게 적어내릴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이 글을 적으면서도, 누군가가 내 뒤로 지나갈 때마다 얼른 숨겼다. 누군가에게 보여주려고 쓰는 글이라지만, 다 쓰지도 않은 글을 보여주는 것이 창피한건지, 내 앞에서 내 글을 읽는 것이 창피한건지, 영 쑥스럽기만 하다. 혹여 내 이 글을 읽은 누군가가 내 앞에서 이 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은근슬쩍 웃어넘기려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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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트라넷 책마을에 올렸던 글.
그리고 여전히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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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방어진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바닷가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다.

[20060206] Panasonic FX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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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miloo.egloos.com miloo 2006.02.07 15:07 신고

    목포로 이사간다며?? 진짜야??
    언제가??

  2. Favicon of http://hagun.egloos.com hagun 2006.02.07 15:22 신고

    26일.. 그래서 이번에 내 짐 정리했다.
    제대하면 확실히 혼자 살아야할듯...

  3. Favicon of http://miloo.egloos.com miloo 2006.02.08 09:12 신고

    하음. 그렇구나. 빨래와 청소와 요리와 설겆이와 공과금과 기타등등의 집안일이 너에게도 찾아 오는구나. 하핫.

    그나저나. 뜬금없이 목포라니. 참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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