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만의 신작은 기대했던 장편 소설이 아니었고, 깊이에의 강요같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단편도 아니었다. 단순히 에세이라고 하기엔 진지하게 쓰여진 것 같기도 하고... 동시에 출판된 현대적 오르페우스에 대해서 썼다는 시나리오에 대한 해설집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같다.


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을 때는
나는 그것에 대해 알고있다.
하지만 누군가로부터 그것에 대해 질문을 받고, 그것에 대해 설명하려하면
나는 더 이상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쥐스킨트가 인용하며 '사랑'의 경우에 놀랍도록 들어맞는다고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은 사실 '시간'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시간보다 사랑을 나타낼때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우리는 항상 사랑을 노래하고 사랑에 상처받지만 누구도 사랑에 대해서 명확하게 설명할수 없다. 사랑은 무엇이다. 사랑은 어떻다. 라고 하는 글을 얼마나 많이 만났고, 공감했던가. 하나의 단어에 그토록 많은 정의를 내릴수 있나. 사랑을 정의한 사람과 글의 수만큼, 사랑은 설명할 수 없다.

쥐스킨트에 따르면, 시인은 자신이 잘 알고있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모르고 있는 것에 대해서 쓴다.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붓이나 펜, 악기를 집어들도록 만든다. 그는 도저히 사랑이 무언지 알수가 없었고, 그래서 사랑에 대한 글을 썼다. 난 그 글을 읽었고, 차분히 읽는 것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어서 그의 생각을 정리하며 글을 쓰게 되었다. 그래서 이 글은, 줄거리를 줄줄 읊는 식의 초등학교 방학숙제보다도 못한 글이 될것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에는 수수께끼 같은 것이 있고 다른 모든 수수께끼보다도 청중의 관심을 끄는 주제다. 하지만 왜 숨쉬는 일이나 먹는 일, 배설같은 일에는 관심이 없을까. <향연>에 나오는 디오티마는 '에로스는 아름다움 속에서의 잉태와 분만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랑을 배설물과 확실하게 구별해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세가지 사례가 나온다.  동물적인 사랑. 완전한 착각 속에서 고갈되어가는 에로스의 세계. 사랑의 요소인 도취·성스러움·창조적 모습이 보이지만, 일방적이었고 의식적인 포기를 하는 사랑.

이 사례들에서 사랑에 빠지면 멍청해진다는 것을 알수 있다. 현실적인 장벽에 부딛혔을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녀를 사랑해요>라는 말을 얼마나 자주 듣는가. 어떻게 우리를 멍청하고 야만적으로 만드는 것이 동시에 가장 큰 행복을 줄 수 있는가.


어떻게 사랑과 죽음이 대립된 관계가 아니라 동료로서 관계를 맺는가. 사랑과 죽음의 불행한 결합은 중세의 어둡고 순결한 죽음의 무도(舞蹈)를 충만한 에로틱의 무도로 변화시켰을때 시작되었다. 이 현상은 죽음에 대한 애호로 나타났고, 문학에서는 사디즘적인 특징으로 이어진다.

클라이스트는 연인과 함께하는 자살이야말로 친밀감의 표시이자 정조의 표현이라고 믿었다. 이는 연인과의 삶이 불가능해지자 연인을 위해서 저지른 베르테르의 자살과는 다르다. 그러나 로테에게 쓴 편지와 클라이스트의 마지막 편지는 죽음을 통해 연인이 영원히 자신의 것이 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사랑의 가장 고귀한 완성을 죽음속에서 찾으려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다.

그리하여 사랑때문에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선구자 오르페우스가 등장한다. 연인을 따라 지하세계로 향하는 오르페우스의 모습은 자살기도로 해석될 수 없다. 그는 죽음에 도전하거나 극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만큼 그녀와 지상에서 머무르려고 하는 것뿐이다. 삶을 지향하는 자살인것이다. 오르페우스적인 모습을 부여받은 예수와의 비교를 통해 인류를 구하려는 사람(혹은 신)과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의 차이를 본다. 예수의 계산된 실수와 예술가의 허영심에서 비롯된 오르페우스의 실수.

쥐스킨트의 글을 내 형편없는 글솜씨로 옮긴것에 용서를 빌며, 마지막은 그의 온전한 글을 통해 끝내야겠다.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를 감동시킨다. 왜냐하면 그것은 좌절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죽음이라는, 인간 실존의 수수께끼같은 두 개의 근원적 힘을 서로 화해시키려는 노력, 두 힘 중에서 더 강한 힘을 약한 힘과 화해시키려는 시도는 결국에는 실패로 끝이 난다. 그에 비해 죽음과 관련된 예수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비참한 최후에 이르기까지 의기양양하게 승리를 구가한다.
예수가 인간적인 연약함을 보인 경우는 딱 두 번뿐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주 잠깐 자신의 의무에 대해 의심을 품었을 때와(<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주십시오.>), 그리고 비통함 속에서 전혀 예기치 못했던, 그리고 일어나리라고 예상할 수 없었던 마지막 말(<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을 하며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이다. 물론 이 마지막 절망적 외침은 단지 신약의 첫 두 복음서에서만 나타나며, 좀 더 나중에 쓰인 <루가의 복음서>와 <요한의 복음서>에는 정치적으로는 올바르지 않은 말로 간주되고 있는 것인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그 대신 자의식이 들어있는 말,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내지는 이미 앞에서도 언급된 말 <이제 다 이루었다>라는 말로 대체된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디 있는가? 우리가 지금껏 말해온 욕망과 충동에 좌우되는 에로스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런 것은 없다. 예수의 경우에는 에로스는 나타나지 않는다. 악마는 예수를 유혹하려 할 때 벌써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아리따운 아가씨나 미소년으로 이 까다로운 젊은 목수를 유혹할 수는 없다는 것, 그 사람의 관심을 끄는 유일한 것은 권력이라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악마는 자기 앞에서 무릎을 꿇고 굴복하면 이 세상 전부를 통치할 수 있는 권력을 주겠다고 예수에게 제안하는 것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는 결코 권력을 포기할 생각은 없지만, 다른 권력, 더 커다란 권능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늘 모든 것을 헤아릴 수 있고, 자신의 감정을 제어할 수 있고, 결코 에로스의 도취에도 빠지지 않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는 매우 냉정하고 근접하기 어렵고 비인간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아마도 우리는 그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사실은 그는 인간이 아니라 신이었을 것이다.
오르페우스는 그 점에서 우리와 아주 가깝다. 기뻐 어쩔줄 모르다가도 금세 변덕을 부리고, 맹목적인 용기는 없으나 어느정도 문명화되어 있고, 빈틈없고 현명하나 완전히 치밀하지는 못하다는 점에서 그는 우리와 닮았다. 또한 오르페우스는 좌절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인간이었다. 아니, 바로 그 좌절 때문에 그는 의심할 바 없이 더 완전한 인간이었다.


눈치빠른 사람이라면 그가 아우구스티누스를 인용할 때부터 사랑에 대해서 '생각'할 뿐 결론 내리지 않을 것임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는 사랑이 세속적이고 맹목적임을 이해하고 불완전하고 모순 투성이의 사랑을 인정한다.
그가 생각한 '사랑'을 허구에 그려낸 시나리오는 어떨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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